바울의 염려

   

갈라디아서4장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율법적 생활을 버리고 율법 없는 이방인처럼 되었듯이 갈라디아 교인들도 율법에 대해 자유하라고 말한다. 물론 이 말씀은 도덕법을 지키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율법 제도로부터 자유하라는 뜻이며, 도덕법을 지킬 때에도 두렵고 무거운 마음으로가 아니고 기쁨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을 말한다. 이전에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참으로 위했지만, 그들이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 복음 진리에서 이탈함으로써 지금 바울에게 마음의 큰 고통을 주고 있다.

 

[13-15]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처음에 갈라디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려 했을 때 여러 가지 육체적인 핍박과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이곳 저곳을 이동하며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말이든지(고후 11:23-30), 혹은 그가 어떤 몸의 질병 때문에 갈라디아 지방에 머물게 되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은 몸의 약함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 일들이 초신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버리셨거나 그를 징벌하시는 표처럼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업신여기지 않았고 멸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그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혹은 그리스도 예수처럼 영접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핍박하였지만, 하나님의 진실한 성도들은 그를 극진히 사랑하고 영접하였던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이러한 행위는 그들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은 증거이었다. 그러나 주의 종 바울에 대한 갈라디아 교인들의 그러한 처음의 태도가 변하고 있었다. 이전에 그들은 바울을 사랑하여 그를 위해 자신들의 눈까지도 빼어주려 하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사도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간의 간격은 그가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했다는 사실 때문에 생겼다. 그가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감 없이 그대로 선포하고 가르쳤다는 사실이 그와 그들의 관계를 나쁘게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었다. 어떻게 진리의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 때문에 원수가 될 수 있는가? 그러나 실상은 그들이 거짓 교사들의 말에 미혹되어 복음 진리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이었다. 그들이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았더라면 서로 원수 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바른 복음 진리 안에서 그러해야 한다. 교회의 참된 일치와 연합은 성경 진리와 바른 교훈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17]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저희는 거짓 교사들, 즉 율법주의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좋은 열심이 아니고 나쁜 열심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열심이 아니고 인간 중심, 자기 중심의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교회 봉사자들의 열심은 인간 중심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이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 중심적이며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복음 진리 중심적이어야 한다. 본문에 이간 붙인다는 원어(엑클레이오)분리시킨다는 뜻이다. 거짓 교사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사도 바울과 분리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열심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울과 분리시키고 자기들에게 속하게 하기 위한 열심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참된 종과 분리시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니었다.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성도들은 목사의 기쁨이며 자랑이고 목사가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교회에서 아무도 그를 필요한 인물로 아껴주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요긴한 인물이 되고 다른 성도들이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나의 자녀들아라는 원어(테크니아 무)는 매우 친근감 있는 호칭이다. 이 말(테크니온)은 문자적으로는 어린 자녀를 가리키며 보통 자녀라는 말(테크논)보다 사랑하는 자녀라는 뉘앙스를 가진다. 본 서신에서 여러 번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들아라고 불렀던(1:11; 3:15; 4:12, 28, 31; 5:11, 13; 6:1, 18) 사도 바울은 오직 이 곳에서 그들을 나의 어린 자녀들아[사랑하는 자녀들아]’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의 진심의 사랑을 나타낼 것이다.

 

사도 바울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에서 떠나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시 복음 진리 위에 세우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있다. 사람에게 전도하고 그를 구원하여 복음 진리 위에 바로 세우는 일은 자녀를 낳아 잘 기르는 일 못지 않게 수고로운 일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만들어지도록 수고한다고 말하고 있다.

 

신약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도 얻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나의 생명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으면 나는 영원한 지옥에 던지울 죄인, 아무 가치가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굳게 거하며 예수 그리스도만 굳게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살아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해야 한다.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음성을 변하려 한다는 것은 사랑과 위로의 음성을 책망의 음성으로 변하려 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음성을 변하려 하는 까닭은 그들을 향해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심이 있다는 원어(아포레오)당황하다는 뜻도 가진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진실히 믿었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토록 속히 변한 일 때문에, 또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서 헛되게 된 것처럼 느껴지는 일 때문에, 그리고 마치 마귀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보다 더 강하게 보이는 상황 때문에, 그들을 향해 의심이 생겼고 당황케 되어 그의 음성을 변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교훈의 목표는 분명하였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지 말고 그가 전한 복음대로 복음 안에서 의와 자유를 누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며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의 안에 거하며 그 의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그의 교훈을 행함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http://www.oldfaith.net/01exposit/02nt/2-09갈라디아서.htm#4장: 아들로서 누리는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