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복음의 유래

  

갈라디아서1장

[11-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啓示)로 말미암은 것이라.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사람의 생각은 완전하지 못하고 사람의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다. 기독교가 불교나 유교 같은 이방 종교들처럼 사람의 명상과 깨달음, 그리고 양심과 이성적, 도덕적 판단에서 나온 정도의 종교라면, 그것은 유일하지도 않고 절대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지전능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라면, 기독교는 이방 종교들과 다르며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복종해야 할 절대적 도리가 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교회에게 그리고 다른 여러 교회들에게 전한 하나님의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며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이나 배운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한다.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구별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그 이상이시다. 그는 사람이시지만, 또한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진 신적 존재이시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시다(1:1). 또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셨다(8:58).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말씀은, 그의 복음이 하나님의 권위와 보증을 가짐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사도직의 독립성과 정당성, 그리고 신적 권위성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깨닫고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받은 이 복음, 즉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되어 있고 기록되어 있는 이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연구하고 믿고 전해야 한다.

 

[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殘害)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年甲者)[동년배]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간증한다. 그것은 무지한 열심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과거이었다. 종교적 열심은 다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른 지식에서 나오지 못할 때 오히려 유익보다 해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을 믿고 섬김에 있어서는 단순한 열심보다 바른 지식을 가진 열심이 필요하다. 예수님 믿기 전에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다. 그가 간략히 증거한 바와 같이, 그는 이전에 유대교인으로서 그의 동년배들보다 더욱 열심으로 믿었다. 그는 교회의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를 치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옷을 지키는 자가 되기도 했다(7:58). 그는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스데반의 죽음 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났을 때 사울은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며 교회를 파괴했던 인물이었다(8:3).

 

[15-17]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하나님]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은 주님의 제자들을 대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이웃 나라 도시 다메섹의 여러 회당들에 갈 공문을 요청하였는데 이는 만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나면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까이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그가 땅에 엎드러지자 이런 소리가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거기에서 그는 거꾸러졌고 마침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었다.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핍박자 사울을 불러 사도 바울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바울의 어떤 선행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선택에 뿌리를 둔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모친의 태로부터 그를 택하셨다고 말하였다. 우리의 생명이 모태에서 시작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시려고 이미 구별하셨다.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전에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1:4).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그를 통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그를 사도로 삼으시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는 구원받은 성도일 뿐 아니라, 또한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 그는 그가 받은 사명이 이방인 선교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구원받은 즉시 바울의 열심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환되었다. 그의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기 원하는 열심이 끓어올랐음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원하는 마음을 주시며 사용하신다.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그때 그 일을 위해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

 

바울은 또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도 가지 않았다. 인간적으로는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는 그를 부르신 하나님과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아라비아를 택하였던 것 같다. 아라비아는 사막과 광야의 땅을 가리킨 것 같다. 그는 거기에서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의 진리들을 묵상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조용한 기도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다.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광야]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태복음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조용한 시간은 가장 귀한 시간이다. 고요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주께 기도하는 시간이야말로 성도의 특권이다. 거기에 성도의 힘과 기쁨과 행복이 있다.

 

[18-19] 그 후 3년 만에 내가 게바[베드로]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15일을 유할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복음과 사도직이 사도들에게 의존하지 않았음을 증거한다. 그가 3년 만에 베드로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도 그와 함께 단지 15일간 머물었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는 베드로 외에 주의 동생 야고보만 보았을 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다. 여기 언급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예루살렘에서 모였던 총회에서 발언했던(15:13)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다(12:17; 2: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이라는 표현은 야고보가 사도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사도 바울의 말과 기록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었다. 거짓말은 제9계명을 범하는 큰 죄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것은 생명과 같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진실을 알아주는 것도 중요하다. 성경은 진실한 증거의 책이다.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고 말했다. 사람의 진실한 증거를 믿을 수 없다면, 바울의 이 말도 성경도 믿을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진실한 증인이 되어야 하고 또 진실한 증거의 말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21-24]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殘害)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길리기아는 바울의 출생지인 다소가 있는 지방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라는 표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받아 그와 영적으로 연합되었음을 나타낸다. 바울이 회심한 지 3년이 지났고 또 예루살렘에 올라가 짧은 기간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나고 교제하였으나, 유대의 교회들은 아직 그를 얼굴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바울의 사도로서의 소명과 그의 복음 사역은 이와 같이 독립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하신 기이한 일이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은혜가 있으며 그의 능력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핍박하던 인물을 불러 구원시켜 그가 핍박하던 그 이름 예수를 전파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종으로 만드신 것이야말로 그의 놀라운 은혜를 증거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상 종종 이런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들이 팔아버린 요셉을 통해 형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동족을 구원하려는 그의 선한 뜻이 꺾이어 미디안 광야로 도피하여 야망 없이 지내던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많은 고난을 받아 쫓겨다니던 다윗을 들어 약속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삼일 만에 부활시켜 세상의 구주와 주로 삼으셨다.

 

바울의 전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 계시로 되었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나 배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본문에서 여러 가지로 증거되었다. 첫째, 그는 회심 직후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고 사도들에게도 올라가지 않았다. 둘째, 그는 아라비아로 갔다. 셋째, 그는 3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베드로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넷째, 그는 그때에도 단지 15일간 예루살렘에 머물었을 뿐이다. 다섯째, 그는 그때에도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주의 동생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다. 여섯째, 이 모든 말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다. 일곱째, 그가 회심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유대의 교회들은 아직도 그의 얼굴을 잘 알지 못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바울이 참된 사도이며 그가 전한 복음이 주 예수께서 직접 계시하신 복음, 곧 하나님의 진리임을 알자.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다. 우리는 이 복음과 다르거나 이 복음과 배치되는 모든 다른 복음들을 경계하고 멀리해야 한다. 교회역사상에는 많은 다른 복음들, 거짓 복음들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천주교회가 전하는 복음이 있고, 자유주의 신학이 전하는 복음이 있고, 은사주의가 전하는 복음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참된 복음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만 모든 인류에게 구원과 영생을 줄 수 있다. 그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있고 그것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과 형벌이 있을 것이다.

 

 http://www.oldfaith.net/01exposit/02nt/2-09갈라디아서.htm#1장: 복음의 유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