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

 

갈라디아서2장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킨 것을 의미한다. 의는 무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완전이다. ‘의롭게 한다는 원어(디카이오오)의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의롭다고 간주한다는 뜻이다. ‘의롭게 되려 하다가라는 말은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라는 뜻이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신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이라는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만 믿고 그것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줄 알았다가 그것이 아니었다면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은 진리이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에게 계시해주신 내용이며 만일 이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죄인이 되게 하시는 것이 될 것이다.

 

[18] [이는]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것임이니라].

 

내가 헐었던 것이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생각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것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세우면이라는 말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하면이라는 뜻이 된다. 만일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하면, 그는 죄인이 될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해 왔고 그 주장이 틀린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9] [이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죽었음이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하나님을 향해,’ ‘율법을 향해라는 말은 원문에서 관계성을 나타낸다(데오, 노모--관계의 여격).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율법과의 관계에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하여라는 말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가 되기 위하여라는 뜻이며,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말은 율법의 정죄, 곧 율법의 계속된 정죄, 누적된 정죄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누구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정죄를 담당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죽은 자가 되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뭇박혔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그가 우리를 대신해,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죗짐을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우리의 죄로 인한 죽음이며 곧 우리의 죽음이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말에서 는 본래의 나, 율법 아래 속했던 나, 곧 옛사람 나를 가리킨다. ‘산 것이라는 말은 사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제 나는 죄로 인하여 정죄되었고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 그러므로 옛사람 나는 이미 끝났다. 그것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본래의 나, 율법 아래 정죄되었던 나, 곧 옛사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사시는] 것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어떤 이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을 육신적으로, 신비적으로 이해했다. 1930년대에 황국주 씨는 머리도 예수의 머리, 피도 예수의 피, 마음도 예수의 마음 . . . 전부가 예수화하였다고 주장하며 예수의 모습을 흉내낸다고 머리를 기르고 수염도 길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로 판명되고 정죄되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은 육신적으로, 신비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도 개개인의 인격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인격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옛사람 나는 이미 죽었고 나는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사람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속에 거하시므로, 이것은 마치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바울은 이것을,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물론, 믿음은 참된 회개를 동반한다.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자만이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성도는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또 성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고(1:12) 영생을 얻는다(3:16). 또 그는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다. 성도의 삶은 믿음의 삶이다. 성도에게 하나님과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없다면 그는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것도 아니다.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의롭게 되는 것(디카이오쉬네)[()]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죽으셨을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인을 구원하심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였고 지금 그것을 변증하고 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이다. 사람은 율법으로 의롭게 즉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될 수 없다. 성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해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또 만일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셨을 것이다. 의 혹은 도덕적 완전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올 수 없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대속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의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는 의,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믿음의 삶이다. 성도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 그것이 구원이다. 성도에게 복음 신앙이 없다면 성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의 도리는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의 주시는 영생과 내세와 천국을 확신케 하는 근거이다. 이것은 죄와 율법의 멍에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며 기쁨과 평강을 준다. 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마다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할 것이다. 성도는 이런 확신과 담력, 이런 자유와 기쁨과 평강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한다.

 

  http://www.oldfaith.net/01exposit/02nt/2-09갈라디아서.htm#2장: 복음 안에 있는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