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

 

갈라디아서2장

[11]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바울은 그를 책망할 일이 있었다. 안디옥은 이방인들을 위해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했던 교회가 있었던 수리아 지방의 한 도시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한 목표는 책망받을 일이 없는 인격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화의 목표이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단번에 훌륭한 인격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인격적 성숙은 예수님 믿기 전에 그가 살아온 상태와 관계가 많은 것 같다. 성화는 매우 더디게 보인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실히 믿는 자들 속에도 인격적 흠과 결함이 많이 있다. 대체로 사람이 자신의 인격적 결함을 알고 있지만, 종종 자기의 부족을 모르는 자들도 있다. 이것은 참 큰 문제이다.

 

인격적 결함 중 대표적인 것은 말의 실수이다. 인격의 온전함은 말의 온전함으로 나타난다(3:2). 사람이 말을 안 하면 실수도 없을 것이지만 괜히 말을 함으로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말에 대해 많이 가르쳤는데, 그것은 우리가 말의 온전함으로 인격의 성숙함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잠언 10:19-20,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잠언 11:12,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7: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잠언 26:20,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야고보서 1:19,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베드로의 실수는 말의 실수가 아니고 행동의 실수이었다. 3년간이나 주께 직접 배웠고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아 복음 진리를 밝히 이해하고 고난을 무릅쓰고 증거했던 베드로는 인격적으로 상당히 성숙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그에게 실수가 있었다. 땅 위에 온전한 인격자는 없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부족이 있다. 지상에서 완전 성화란 없다. 성도의 성화가 심히 더딘 것이 현실이다. 베드로에게 책망할 일이 있었을 때 바울은 그의 앞에서 그를 책망하였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 앞에서 아부하고 뒤에서 그를 비난하는 것은 나쁜 행동이지만, 사람 앞에서 바른 충고를 아끼지 않고 뒤에서 그를 존중하고 함부로 그를 비난치 않는 것이 좋은 인격의 모습이다. 사람 앞에서 그를 공의와 겸손으로 책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훌륭한 행동이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27:5-6).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오기 전에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자 그는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갔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은 율법과 유대인의 관습에 젖어 있는 자들이었던 것 같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지 말아야 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고 있다고 말했었다(10:28).

 

이것은 구약의 율법에 의거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이방인들과 함께 먹는 일을 금한 곳이 없다.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한 유대인의 관례법은 음식에 대한 법이나 우상숭배를 금한 계명, 또는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규정한 법(7:3-4) 등에 근거한 것 같다.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이 왔을 때 그들을 두려워해 떠나 물러갔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에게 법을 어겼다고 비난하고 공격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베드로가 떠나 물러간 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약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두려워함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비난받기를 싫어하고, 싸움과 갈등보다는 평안과 안정을 좋아한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뿐 아니라,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였고, 바울의 동료인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다.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외식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는 것이 정당한 일이었다면, 그는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 앞에서도 그렇게 행동했어야 했다. 반대로, 그것이 유대인들 앞에서 할 수 없을 정도로 옳지 않은 일이었다면, 그는 그들이 없었을 때에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실과 충성을 원하시지만, 연약한 인간은 때때로 외식의 죄에 빠진다.

 

베드로의 연약함은 그 혼자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물러가자 함께 먹던 유대인들도 같이 물러갔다. 거기에 함께 있었던 바나바까지도 그러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임자의 역할이 큼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만일 베드로가 그때 외식하지 않고 담대히 처신하였었다면 다른 사람들도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연약하여 외식하므로 다른 사람들도 외식에 빠졌다. 신앙생활에는 앞선 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처럼 기독교계가 혼란한 시대에는 바른 사상과 분별력과 인격을 구비한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지교회 안에서도 목사와 장로의 역할, 교사와 권찰의 역할, 각 회 회장의 역할이 크고 중요하다. 그들이 말과 행실에 있어서 모범이 되면 교회에 유익을 끼치지만, 그들이 본이 되지 못하면 해를 끼친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교회를 건립하는 것을 말하며, 부덕한 것은 교회를 파괴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의 일꾼들은 믿음에 바로 서서 덕을 세우는 자, 즉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14-15]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베드로]5)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도 베드로의 외식적 행위는 복음 진리대로 행하지 않은 실수이었다. 복음 진리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이방 죄인이라는 표현은 이방인들이 본래 죄인이었음을 보인다. 이방인들은 본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 우상들을 섬기며 살았고 도덕적으로도 여러 가지 더러운 죄악들 가운데 파묻혀 살았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옛날부터 관리들은 탐욕적이고 부패하였고 가난하고 비천한 상민들은 고통과 눈물과 서러움이 컸다. 또 아내들이나 종들은 구타와 학대를 당하여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고 며느리들은 종들처럼 가정 일을 해야 했다. 이방 사회에 참으로 진실과 공의와 정직, 사랑과 선이 지배한 때는 한번도 없었을지 모른다.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본절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사람이 어떻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사람이 모든 죄악된 처지 곧 죄인의 신분과 법적 책임, 그리고 죄성으로부터 구원받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본래의 의롭고 선한 모습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선,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을 말한다. 신명기 6:25,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그러나 세상에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 참된 의인은 하나도 없다. 바울은 로마서 3:11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했고, 로마서 3:20에서도,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하였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본절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함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는 말씀과 같다.

 

또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했다. ‘율법 외에라는 말은 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없이라는 뜻이다.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과 다른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 곧 구약시대에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에서 암시된 바이었다. 또 이 구원의 방법은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는 방법이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왜 예수님만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은혜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 초기부터 제사제도를 통해 암시되었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담당하셨으므로 우리가 그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3: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는 말씀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바로 아는 자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복음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해야 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고 예수님 믿는 모든 사람은 형제 자매이며 한 식구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모든 믿는 성도들을 존경하고 사랑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바로 깨닫고 우리의 삶의 새로운 동기를 발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수치와 참혹한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그로 인해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그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에 억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기를 원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하고, 또 모든 악을 버리고 거룩과 의, 선과 진실을 지키며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http://www.oldfaith.net/01exposit/02nt/2-09갈라디아서.htm#2장: 복음 안에 있는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