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찬송의 정의, 요소, 목적
찬송이란 하나님을 높이어 노래하는 것, 곧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속성들과 그가 하신 일들을 인정하고 높이어 노래하는 것을 가리킨다. 찬송가 19장, “내 영혼아 찬양하라, 주님 앞에 엎드려/ 구속하신 넓은 은혜 높이 찬양하여라.” 찬송가 책에서 직접 하나님을 높이어 찬송하는 가사들은 55장 이전에 ‘찬양과 경배’라는 주제의 가사들과 73장부터 203장까지의 가사들 중의 다수이다.
성도의 노래들에는 하나님을 직접 찬송하는 것들뿐 아니라, ‘영적인 노래들’도 있다.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영적인]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도의 기도와 간증, 위로와 권면의 말이 여기 속한다. 찬송가 책의 많은 노래들은 이런 부류의 것이다. 예를 들어, 278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 자매 한 자리에 크신 은혜 생각하여 즐거운 찬송부르네. 내 주 예수 본을 받아 모든 사람 내 몸같이 환난 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세.” 이렇게 보면, 찬송가 책 이름은 ‘찬송가’라고 하기보다는 ‘찬송들과 영적 노래들’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성도의 찬송과 영적 노래는 물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부수적으로이지만 사람들에게 교훈과 유익을 주는 목적도 가진다.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 말씀의 원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며 모든 지혜로,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들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마음에 감사함으로 주께 찬양하라”고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찬송과 영적 노래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뿐 아니라, 회중에게 교훈을 주는 의미도 있음을 증거한다. 신명기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노래를 가르치게 하셨는데, 그 목적은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깨우치시기 위함이었다. 찬송과 영적 노래에는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교훈과 유익을 주는 목적도 있다.
찬송의 이유
우리는 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가? 첫째로,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므로 우리는 그를 찬송해야 한다.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자의 이름과 그 영광, 그 지혜와 그 능력의 무한하심, 그 선과 그 인자의 풍성하심을 마땅히 찬송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4:10-11,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구원자이시므로 우리는 그를 찬송해야 한다. 시편 96: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우리로 하여금 그를 찬송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에베소서 1:6, 12, 14,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해야 한다. 구원의 경험과 지식과 감격이 없는 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마다 그를 높이고 자랑하고 찬송해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5:9,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 . .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요한계시록 14:1, 3,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섰는데 . . .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救贖)함을 얻은 14만 4천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찬송의 방법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는 바른 가사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세상 음악은 단지 육신적 감정과 갈망을 토로하는 것이지만, 성도의 찬송과 노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과 하나님 앞에서 간증하고 감사하고 고백하며 간구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 가사의 노래나 찬송이 될 수는 없다. 찬송에서 가사는 곡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찬송가책의 노래들도 다 똑같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가사의 내용에 따라 더 가치 있는 것도 있고 덜 가치 있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찬송의 가사는 우선 복음 진리에 일치해야 한다. 그 내용은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특히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신 주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어야 한다. 속죄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며 진수이다. 그러므로 속죄의 찬송들은 가장 귀한 찬송들이다. 예를 들어, 145장, “오 거룩하신 주님.” 147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186장, “내 주의 보혈은.” 188장, “만세반석 열리니.” 189장,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196장, “날 구원하신 예수를.” 200장, “주의 피로 이룬 샘물.” 210장, “내 죄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403장, “나 위하여 십자가의.”
뿐만 아니라, 찬송의 가사는 성경의 교리 체계에도 일치해야 한다. 성경의 교리 체계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어떤 노래는 찬송이나 영적인 노래가 되기에 부적합하다(예를 들어,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 272장, “인류는 하나되게 지음받은 한 가족”). 자유주의 교단들과의 연합 활동은 이런 오류의 포용을 초래하였다. 신성한 찬송가 책 안에 찬송답지 않은 가사들이 포함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근심시키고 노엽게 할 일이다.
우리가 쓰는 통일찬송가는 한국교회의 영적 퇴보의 산물이다. 한국 교회가 여러 해 동안 썼던 새찬송가의 서문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1959년 예장 총회가 WCC를 탈퇴하고 에규메니칼 운동 반대를 결의한 후 그 때까지의 ‘합동찬송가’ 출판 사업도 에큐메니칼 계획의 하나라는 것을 선언하고 그와 인연을 끊음과 동시에 . . . . 이것은 영구히 한국 기독교계 보수 진영 전체의 찬송가책이 되기를 기원하고 끝이는 바이다.” 이것이 바른 정신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보수적 교회들은 이런 정신에서 퇴보하였다.
또 성령에 대한 어떤 찬송도 성경적 교리에 맞지 않는다(예를 들어, 172장, “빈들의 마른 풀같이.” 173장, “불길 같은 성신여.” 177장, “성령이여 강림하사”).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이미 오셨고 그들 안에 영원히 거하시기 때문에 이 사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표현의 가사는 옳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성령의 오심을 간구할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 속에 오신 성령께서 우리 속에 충만히 역사하셔서 우리의 인격 전체를 주장하시기를 구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곡으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시편 96: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행위이다. 히브리서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러므로 예배와 찬송은 가장 좋은 방식으로 드려져야 한다. 빌립보서 1:10,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
음악의 아름다움은 질서와 조화와 안정성에서 나오며, 그것은 정상적 화음과 박자, 적당한 소리세기와 빠르기에서 나온다. 기본적 정상 화음은 도미솔, 도파라, 시레솔이며, 기본적 정상 박자는 강-약-중강-약(4박자의 경우) 혹은 강-약-약(3박자의 경우)이다. 불협화음이나 빈번한 싱코페이션의 사용, 과도한 소리세기나 빠르기는 질서와 조화와 안정성을 깨뜨리고, 결국 음악의 아름다움을 해친다.
음악의 조화와 안정성을 저버린 현대음악은 인간의 육신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음악은 될지 몰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곡으로서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 오락적인 음악은 옛날부터 우상숭배와 어우러졌다(출 32:6, 19).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과 영적 노래에 있어서 얼마큼 세속적일 수 있는가를 생각지 말고 가능한 한 세속적 풍조를 배격하고 가장 경건하고 아름다운 곡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세상 음악은 인간을 만족시키는 것이지만, 성도의 찬송과 영적 노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에베소서 5:19,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아름다운 목소리나 공교한 악기 연주가 진실한 믿음과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아름다운 목소리나 악기 소리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나 악기 연주를 원하신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이다(히 13:15).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원하신다. 때때로 외적으로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진실한 믿음과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 감동도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찬송은 성도의 영적 생활의 표현이므로 우리는 진실한 속죄 신앙을 가지고 늘 말씀과 기도로 은혜 충만함을 누리는 가운데 은혜의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야 하겠다. 난 지 몇 개월 만에 시력을 잃었던 파니 크로스비가 평생 약 8천개의 은혜로운 찬송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를 통해 성경을 많이 배웠고 주 예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늘 보는 첫 번째 얼굴이 나의 구주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라.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눈이 멀어 그를 더 잘 찬송할 수 있게 하기를 원하셨다고 믿는다. 내가 만일 시력이 있었다면 나는 결코 나의 찬송시들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중에는 그가 쓴 찬송시가 많이 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