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의 교회연합과 분열 논쟁


1)60년대 영국 복음주의권의 전반적 분위기

1960년대는 로이드 존스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힘든 10년이었다. 마치 부흥이 막 임할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던 복음주의자들과는 달리 로이드 존스는 영국의 영적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여러 곳에서 강의했던 로이드 존스의 강연들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전선에서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1950년대에 로이드 존스의 자극을 받아 청교도 대회등을 통해서 교리의 중요성을 새롭게 발견한 젊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교리만을 강조하는 정통주의적인 성향으로 빠질 위험성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로이드 존스는 교리 공부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이전의 강조점을 바꾸어 교리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역설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로이드 존스의 성령의 능력에 대한 새로운 신뢰의 강조를 듣고서 광범위한 은사의 회복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은사주의자들이 자신이 말한 부흥의 참된 본질적 의미를 손상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회연합(에큐메니칼) 운동으로 발생한 교회론 문제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진리의 우선권을 문제삼을 뿐만 아니라 영적 일치는 어떤 외형적인 하나됨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복음주의는 다양한 교파로 흩어져서 존재할 수 있다는 복음주의 주장에 도전을 하고 있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파의 연합을 목표로 함으로써 영적이며 교회의 양면성에 기초를 둔 일치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로이드 존스는 당대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가져온 이러한 상황에 대해 가장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강하게 표명했다. 이러한 로이드 존스의 답변은 영국의 복음주의의 분열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제 이 문제를 조금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에큐메니칼 연합이냐? 복음적인 연합이냐?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1960년대는 부흥이 아니라 논쟁의 10년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논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교회연합의 문제였다.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은 교회연합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이미 확실하게 정리해두었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 논문과 책과 토론과 회의들은 한결같이 존재하는 모든 교파를 하나의 교회로 통합하려는 목적은 선하고 옳은 것이라는 견해를 고수하고 있었다. 1964년에 노팅함에서 열린 한 영국 교회협의에서는 '1980년 부활절까지는 하나의 교회‘를 만들자고 말할 수 있었다.남아있는 문제라고는 어떻게 이러한 목적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수단의 문제였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교회연합이라는 문제 자체가 시작일 뿐이었다.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단순한 반대보다는 어떻게 참된 연합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줄 것인가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복음주의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상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반대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활을 해야 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형편이었다. 로이드 존스가 에큐메니칼 운동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누구라고 하느냐?’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문제였다. 로이드 존스가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한 가장 주된 이유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너무 넓게 내리는데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신약성경과는 다른 것이다.



2)복음주의내의 분열의 도화선이 된 로이드 존스의 제2차 영국전국복음주의대회 개회연설

영국 복음주의 교회는 1966년 10월 18일 저녁 웨스트민스트 본당에서 개최된 제2차 전국 복음주의 회의에서 결정적으로 분열되었다. 이 회의의 주체는 복음주의 연맹이었고, 이 단체는 원래 복음주의가 영국내에서 생명력 있게 존속하게 하기 위해서 1846년 처음 조직되었다. 복음주의 동맹이 처음 결성될 당시 복음주의자들은 교파문제에 대한 의견차이가 존재함을 느꼈고 종종 성경의 영감, 선택교리, 천년왕국문제 같은 것에 대한 심각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이러한 불일치에 대해서 연합할 분명한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1846년의 제1차 전국복음주의회의는 복음주의자들이 서로간의 의견이 다를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실제적인 8가지 규칙을 만들기도 했다.

제2차 복음주의회의도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모였다. 1966년 회의는 복음주의 연맹에 의해서 조직된 1846년 이래로 영국 복음주의자들의 첫 번째 가장 중요한 모임이었다. 회의의 목적은 복음주의의 연합을 추구한 것이었으나 결과는 복음주의의 분열로 끝났다.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은 로이드 존스와 존 스타트의 공적인 대결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복음주의 안에는 이미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단지 문제가 표면화되지 않고 잠재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로이드 존스의 제2차 복음주의 개막연설과 그리고 이 연설에 이어 이 회의의 의장이었던 존 스타트가 공개적으로 로이드 존스의 연설이 비성경적이며, 비역사적이라고 반박한 데서부터 영국복음주의는 공적으로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문제의 배경과 과정 그 결과 그리고 이 문제가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주는 의미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로이드 존스가 행했던 제2차 영국전국복음주의대회의 개막연설을 상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연설은 로이드 존스의 교회관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는 한편의 강의일 뿐만 아니라 영국 복음주의 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건을 유발시킨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문에는 없지만 소제목을 달아서 강의 전문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로이드 존스가 개회연설을 하게 된 배경

“제가 말씀드릴 주제는 교회연합입니다. 제가 이 주제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위원회의 요청에 따른 것입니다. 저는 이 연설이 위원회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제가 오늘밤 여기에 와서 여러분에게 제 자신의 관점을 은근히 주입하도록 위원회 간부들이 친절과 호의를 제게 베풀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위원회 앞에서 나타나서 한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특권을 저는 가졌습니다. 또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제 자신의 견해를 진술하였습니다. 저에게 오늘 밤 여기에 와서 많은 공중들 앞에서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하겠다고 말씀드린 바로 그 문제를 진술해 달라고 요청한 이는 그 위원회 회원 자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로 말씀드리는 데 대한 근본적인 책임은 그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에게 그것을 다시 여러분에게 반복해서 말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로이드 존스가 생각하는 현시점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교회론 문제

그러나 그 점 때문에 저는 겸연쩍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실로 이런 기회를 갖게 되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왜냐하면 오늘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현시점에서 생각하고 직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숙고한 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 방식대로 하였다면 이 집회 전체를 바로 이 한 주제를 위해서 할애했을 것입니다. 다른 주제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가 믿기로 이 점은 우리의 다른 모든 난제들을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제가 봉착한 난관은 짧은 시간에 그러한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본질과 교회 연합문제는 신약성경의 주요 강조점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이 주제가 어찌해서 그처럼 중요한 주제입니까? 한 가지 이유를 말씀드린다면 교회의 문제는 항상 중요합니다. 신약성경 자체에서 교회의 교리에 주어진 탁월성을 살펴보십시오.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난제들은 사람들이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결함있는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야기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특별한 많은 난제들도 교회의 본질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게 됨으로 단순하게 풀려집니다. 그런 다음에 교회연합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제까지 말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일반적인 서론의 방식으로 말해진 것을 강조하고 싶다는 말씀밖에는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교회의 연합은 영적이면서 역시 가시적인 문제라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세상으로 믿게 하옵소서. 연합은 영적인 것이어야 할 뿐 아니라 눈에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와 교회연합의 문제를 숙고하도록 강하게 강조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숙고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복음주의 연맹이 탄생한 배경

자, 우리는 여기서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로서 함께 모였습니다. 복음적이라는 말은 제한적인 어휘입니다. 그 말은 특별한 의미와 의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전체 문제에 있어서 특별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역사에 대해서 잠깐만 간단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100여년 동안 바로 이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해왔습니다. 오늘밤 우리의 모임을 주최하고 있는 바로 이 복음주의 연맹이라는 공회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 공회는 1846년에 탄생되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존 헨리 뉴만과 다른 사람들이 로마교회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로마교회로 넘어가는 추세는 바로 이 연맹의 시작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복음적인 사람들은 위험표시를 알아챘고 저희들이 함께 모여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 후에 자유주의적인 , 또는 현대주의적인 운동, 고등비평운동이 들어왔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무엇으로 부르기 좋아하든지 간에 그것은 복음적인 사람들의 난제와 문제를 증가시켰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이 난제를 대처했습니까? 그들은 여러 연맹과 운동들과 공회들을 조직함으로써 그러한 난제들을 대처했습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해서 매우 제한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잠시적 조처로서 또는 세상적인 잠깐 동안의 편의로서라면 그들이 행한 것은 전적으로 정당했다는 데에 우리는 다 찬동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 가공할 경향성에 비추어 볼 때 자기들이 함께 모여서 힘을 북돋아주고 믿음 안에서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초래한 현실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인식

“이 점은 즉시 오늘밤 우리가 다루는 주제로 우리를 인도해줍니다. 저는 여기서 주창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상황에 처했는데 그 상황은 에큐메니칼운동이라고 알려진 것이 우리 속에 들어왔고 또한 우리 속에서 일어남으로써 매우 큰 영향을 받아 나타난 새로운 성향입니다. 이런 일은 1910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인 우리를 위해서 그것이 긴박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암스테르담에서 제1차 WCC(세계교회협의회)가 열리던 1948년 이후에 그러하였습니다. 오늘밤 제가 말씀드리는 주장의 본질은 제가 보건대 이 운동이야말로 우리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을 가져다주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후에 전혀 겪지 못했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16세기에 대단한 격변이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후 여기저기서 여러 변화와 운동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다소 정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새로운 것이 우리 중에 들어와서 전세계의 중한 모든 교단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 교단들은 우리들에게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자기네들은 자기들의 전체문제를 재고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용광로 속에 집어던져 넣어 새로운 세계교회가 거기서 나타날 수 있게 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에큐메니칼한 교회내의 복음적인 그룹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저는 오늘 저녁 여러분에게 하나의 호소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기에 논박하려고 오지 않았습니다. 제 친구들은 제가 논박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논박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여러분에게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저는 입장이 너무 심각하고 너무 긴박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적인 사람들은 오늘날 그 전에 전혀 갖지 못했던 기회를 가졌다고 믿습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그 기회를 다시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매우 중차대한 순간에 우리가 함께 모였다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단번에 우리 스스로에게 말해야 하는 어떤 몇 가지 요점들이 있음을 지적하여 드리려 합니다. 저는 다만 이점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향하여 던져야 하는 두 가지 주요한 질문이 있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교회의 복음적인 편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의문의 여지없이 그 동안 전체상황은 포괄적인 전지역을 하나로 묶은 국가교회를 향하여 기울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관점을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많은 복음주의자들도 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면한 첫 번째 질문은 우리가 복음적인 입장에 서서 저항하고, 우리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 영향력이 서서히 침투하여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개념이 그릇되었고 우리들의 개념이 올바르다는 것을 알게 하기를 희망하고 있는가? 우리는 계속 그렇게 해나가는 것을 만족해하는가? 입니다. 우리가 급기야 로마 카톨릭 교회까지 포함시키는 하나의 지역내의 한 보편교회 안에 복음적인 입장을 견지한 채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까?


우리는 어디서 출발해야 하는가?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출발할 것인가? 신약성경으로부터 출발할 것인가?

두 번째 문제는 이러합니다: 이 전체 문제에 있어서 어디서 우리가 출발해야 합니까? 여기 다시 우리 가운데 틈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상황에서부터 출발하고 그것을 개선하고 최선을 다하여 고치는 것으로 만족하겠는가? 아니면 에큐메니칼 운동의 도전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도전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면서 우리 새롭게 출발하자, 신약성경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겠는지요? 이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용광로 속에 모든 것을 집어던질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새롭게 출발하자, 이미 존재하는 것을 고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새롭게 시작하고 신약교회가 진정으로 어떠한 교회이어야만 하는지 발견하자고 말합니다.


에큐메니칼주의자와 복음주의자의 가장 큰 차이점: 교회의 교리 문제를 우선시 하느냐? 아니면 교회연합문제를 우선시 하느냐?

우리 앞에 당도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의 교리문제입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교회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을 갖기 전에는 교회연합을 논할 수 없습니다. 여기 위대한 구분이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사람들은 교리보다 교제를 앞세웁니다. 우리는 복음주의자들입니다. 우리는 교제보다 교리를 앞에 놓습니다. 사도행전 2:42절에서 우리는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교리)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되어 있음을 기억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진수자체입니다. 교회에 대한 유명한 프로테스탄트의 정의는 이러합니다: 교회는 참 교리가 설교되는 곳이고 성례가 바르게 정규적으로 시행되는 곳이며 권징이 시행되는 곳이다. 분명히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그리고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첫 번째 표지인 참된 교리는 무엇인가?

그러면 참된 교리는 무엇입니까? 이미 언급한 바입니다.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우리의 관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신성을 역설하는 것-동정녀 탄생, 이적과 초자연적인 것, 그의 속죄, 희생, 대속, 죽음, 그리스도의 문자적이고 육체적인 부활, 성령의 인격과 그 사역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구원의 진수가 되는 교리들입니다. 그것이 전파되어야 할 교리요, 교회의 참된 표지로 첫 번째가 되는 메시지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것들을 믿기 때문에 언약 가운데서 함께 모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들이고 저희들의 일상생활에서 이점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그것이 교회에 대한 복음적인 관점입니다.


교회분열이란?

자, 이제 그점은 저로 하여금 다음 요점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것은 교회분열의 죄입니다. 제가 어떤 의미에서 교회분열의 죄라고 말씀드리는가요? 제가 보건대 오늘 현시점에서 우리 앞에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로마 카토릭 교회는 우리더러 ‘너희는 프로테스탄트들이니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배반한 교회를 떠나는 것은 교회분열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요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교회분열이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이 특별히 고린도전서에서 개요적으로 그려주고 정의하는 바대로 하면 분열을 정당화시킬 만큼 중요하지 않는 문제들 때문에 참된 가시적인 교회의 지체들 간에 분쟁하는 것이 바로 교회분열의 죄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가입하지 않는 것이 교회분열의 죄가 아니라 에쿠메니칼 운동에 가입함으로써 복음적인 연합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교회분열의 죄다

저와 여러분은 복음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본질들에 관해서 찬동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같이 이 한 특별한 집회에 함께 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시간 거의 대부분을 서로 떨어져서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이처럼 본질적인 문제들을 부인하고 반대하는 사람들과 합하고 그들의 일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우리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과 눈에 보이는 연합을 하고 있습니다. 자, 그것이 바로 죄악입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어째서 그렇게 나뉘어져 있습니까? 중요한 교단들 사이에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만일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중 거의 대부분이 사실상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출생의 문제입니다. 나는 침례교도로 태어났고, 나는 성공회 교도로 태어났고, 나는 침례교도로 태어났고, 나는 메소디스트로 태어났고, 아니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나는 이러저러한 것으로 태어났다는 식입니다. 내가 거기서 머물고 나는 그것을 위해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식입니다. 그러한 논리가 얼마나 자주 제기됩니까? 저는 주장합니다. 진정으로 문제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인 우리가 우리 삶의 주요한 율조나 우리 사긴의 대주분을 나뉘어져 있는 가운데 둔다는 것은 다름 아닌 교회분열의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이 문제를 아주 급박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오늘 이 밤에 모인 여러 복음적인 사람들에게 하나의 호소를 하고 싶습니다. 어떤 이유로 우리는 함께 모이지를 못했습니까? 우리가 그 질문에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이유들이 제시됩니다. 복음전도의 기회를 놓칠 것이니 함께 모이지 못한다는 식의 말이 들립니다. 그와 같은 종류의 이유가 제시됩니다. 저는 그러한 논리를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령이 어디에 계십니까? 분명히 성령께서는 우리 가 함께 모여 진리를 위해 싸운다면 진리를 영예롭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이 모순되는 입장을 이런 방식으로 고집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현시점에 주요 모든 교단들 안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시간 대부분을 자기 지도자들을 비평하는데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비평받는 지도자들이 여전히 그들의 지도자인채로 있습니다.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고 복음적인 연합을 추구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우리는 성경의 믿음을 방어하고 지키는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과거에 여러세기 동안 이 동일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던 영광스런 사람들의 후계자들이며 그 사람들을 현대적으로 나타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복음적인 사람들로서 이러한 호소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이제까지 일어났던 일 중에서 가장 큰 비극이라는 이 현대적인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말하고 싶으시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너무나 썩어서 종교개혁자들이 행한 일은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비극은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을 떠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극은 로마교회의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 즉 청교도들, 언약주의자들, 초기 메소디스트들을 현대적으로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그 기회를 알 수 있습니까?


복음적인 연합이 이루어질 때 부흥과 영적 각성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

이 옛 증거를 기회를 따라서 간헐적으로 유지하지 말고 항상 유지하며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타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죄를 깨달을 필요성, 새로운 생명에 대한 필요성,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되는 필요성이 이 때보다 더 큰 적이 없었습니다. 성령께서만이 바로 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들이 믿음의 본질적이고 사활이 걸린 것들을 나타내 보이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쓸텐데 성령께 그러한 교회들에게 복을 내려주시기를 구할 권리가 있을까요? 분명히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이 말씀한 복을 주실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믿는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교회들로서 함께 서서 부단히 함께 모든 일을 감당하며 함께 증거를 한다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강력한 부흥과 재각성의 역사로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기대할 권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반대에 따른 예상되는 어려움들

저는 사람들이 어려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러한 어려움들을 축소시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적극적인 원리들을 제시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마땅히 찬동하는 것들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위해서 더 구체적으로 일해 나가야 합니다. 크고 심각한 난제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난제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내가 권면하는 것을 하려고 할 때 자기들 앞에 엄청난 과제, 재정적이고 경제적이고 가정적인 난제를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목회자들이나 교구목사들이 있음을 저도 압니다. 저는 그것을 축소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제 마음은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닿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원리들에 입각해서 행동하려 하면 그 큰 난제들이 우리에게 봉착해 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로서 우리가 그 난제들을 두려워할 때가 온 것인가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난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한 난제들을 가지고 있었고, 가정에서 쫓겨남을 받기도 하였고 죽음의 위협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세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들은 믿었습니다. 알았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싸우지 않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음을 알았습니다. 수세기에 걸쳐서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진리를 알았을 때 하나의 문제도 만나지 않았던가요? 물론 만났습니다. 그러나 문제로 말미암아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세대의 모든 순교자들과 신앙 고백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지금은 역사의 대 전환점이자 영광스러운 기회의 날이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우리는 거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대 전환점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말씀드립니다. 16세기 이후 이와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의 영광스러운 기회의 날입니다. 우리는 수로는 작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의 교리가 복음적인 사람들 속에서 인기를 얻지 못하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성경 전체에서 그것은 가장 영광스러운 교리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수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와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집으로 가셔서 다시 기드온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또한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통하여 성취하셨던 일들에 대한 다른 많은 예를 읽어보십시오. 수에 관심을 가지지 마십시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고 복주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 그 기회를 포착합시다. 제가 믿는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읍시다. 우리는 사랑을 가지고 이러한 것들을 대처해 나갑시다. 우리는 큰 은혜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한 가지 목적, 곧 주의 영광과 그 나라를 위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이러한 여러 난제들에 대한 참된 해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몇 년만에 에큐메니칼운동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에큐메니칼 운동은 우리로 하여금 운동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교회의 차원에서 우리의 난제를 대면하게 만들었고 사실상 우리 복음적인 교회들이 서로 교제하고 협력하도록 이끄는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렇게 감사할 때가 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날을 속히 허락해주시도록 기도합니다(시대의 표적 33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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