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기도하라 (전편)

- 에베소서 6:11~18 -

샬롬선교회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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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이 보여주는 마지막 무기(武器)'기도'입니다. '성령의 검''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했지만, 이번에는 '성령의 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 다양한 기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의 종류로는 감사, 찬양, 고백, 소원, 중보 등이 있습니다. 기도의 방법으로는 입으로 하는 기도, 큰 소리로 격렬하게 기도하는 기도도 있고, 침묵이나 금식을 동반한 기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종류나 방법이 아니라, 또 어떤 과제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서의 기도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바울이 에베소서를 쓰는 방식, 설득의 논법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0 “끝으로". 이것은 순서상 '마지막에 말씀드리겠습니다.'라는 식의 부연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요긴한 돌로서 - 당시 건물을 짓는 방식을 참조 - 전체의 모든 것이 제대로 의미를 갖게 되는 - 그런 위치를 가진 것이 마지막에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무기의 경우에는 '성령의 기도'가 모든 하나님의 무기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 최고의 특권으로서의 기도의 계보

 

+ 기도는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원숭이가 아무리 진화해도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기도라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해온 것은 아닙니다. 그 계보를 살펴보자합니다.

 

(1) 가인의 계보

+ 가인의 계보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사람을 위협하는 힘으로 도시문명을 건설한 계보입니다. 살육과 복수를 통한 지배의 역사를 추적합니다.

 

(2) 셋의 계보

+ 가인의 계보와는 반대로 인간의 연약함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살아가려는 계보입니다. 기도의 활성화를 실현하는 계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계보입니다. 셋은 자신의 아들 에녹이 태어났을 때 그 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창세기 4:26)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불경건한 흐름과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경건한 흐름이 확연히 구분됩니다. 에녹에 대해서는 특별히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5:22]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그리고 아들, 딸들을 낳았다.”

[창세기 5:23] “에녹의 일생은 삼백육십오 년이었더라.”

[창세기 5:24]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는 사라졌더라.”

 

+ 에녹의 생애는 365. 아들 므두셀라가 태어난 것은 그가 65세 때,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실로 300년입니다. 그가 기도했다는 말은 없지만, 셋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시작한 그 계보는 그 자손에게 이어져 에녹에게 특별히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도의 계보는 그것이 활성화되어 라이프 스타일로 계승되었고, 에녹은 그 본보기가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내면입니다.

 

+ '하나님과 동행하다''동행하다'는 습관적으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지속하는 삶, 그것을 '기도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에녹은 그 본보기입니다. 에녹은 소위 말하는 큰 사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하고, 기도를 생활화하는 큰 사업을 하지 않고, 그것을 완수한 것입니다. 그 축복의 결과는 신기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으므로 그는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기도의 생활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큰 사업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별 것 아닌 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계보에 있는 사람에게는 역사를 뛰어넘어 빛을 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도 기도라는 위대한 행보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초대하셨음을 믿습니다.

 

+ 기도의 삶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안에 거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신 후에도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누가복음 2: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곁에 머무는 걸음은 하나님(혹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 사랑의 교제 안에 계속 머물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표현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주님이 그분 안에 머물러 계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즐거이 기도하라'고 찬송할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참고로 '머무르다'를 히브리어로는 '서다'라는 뜻으로 표현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본래의 위치에 굳건히 서 있으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2. 기도의 영역

 

+ 시편은 하나님과 우리의 삶의 관계를 맺는 데 있어 최고의 텍스트이며, 시편을 창으로 삼아 성경 전체를 생각하며 하나님을 더 깊이, 더 친밀하게 알 수 있는 명상의 길잡이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시편 묵상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수도원에서는 성무일과로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지적인 명상에서 묵상(침묵)으로, 그리고 관상의 세계로. 그것은 더 이상 언어가 아닌 오감의 모든 감각을 통해 하나님을 맛보는 세계입니다. 주 안에 있는 자들이 함께 시편 명상을 나누면 더 풍성한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열릴 것이라 믿습니다.

 

+ 기도의 세계에는 구술기도, 명상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 네 영역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한 사람 안에 네 가지 영역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지적으로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감성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로 하는 기도가 서툴고 그 표현이 유치하더라도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맛보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느끼는 영역, 그것이 관상기도의 영역입니다.

 

+ 명상기도는 하나님에 대해,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성을 가지고 사색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역입니다. 이 영역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매일 우리가 식사를 하듯이, 또 어린아이가 음식을 잘 씹어 먹으며 영양을 섭취하며 성장하듯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읽고 끊임없이 배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 묵상 기도는 명상의 영역에 있는 것을 침묵 속에서 숙성시키는 영역입니다. 된장이나 간장, 혹은 포도주 등은 술통에 넣어 천천히 숙성시켜 숙성시켜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숙성시킬수록 숙성도가 높아져 좋은 품질의 제품이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적인 축적도 고요한 침묵 속에서 숙성되어 갑니다. 예술가들은 한 번 받은 감동을 바로 사람들과 나누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감동을 마음속에서 숙성시켜 하나의 표상이 될 때까지 침묵하는 것입니다. 이 묵상의 영역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침묵의 교제입니다.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입에서 저절로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문자화된 것일 수도 있고, 찬송으로 불리어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 관상기도의 영역은 감각의 영역입니다. 느끼는 세계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손이 내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의 얼굴(미소)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미소)가 보입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임재의 냄새가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입에서 맛있게 느껴집니다.” ... 이런 표현은 영적 오감(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으로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관상의 영역에 민감한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직관형(요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명상의 영역에 뛰어나고 말로 설명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은 논리형(바울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 두 가지 유형이 모두 있습니다. 다만 그 비율이 다를 뿐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식과 영역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 상호보완성을 우리는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구두의 기도, 명상의 기도, 묵상의 기도, 그리고 관상의 기도, 이 모든 것이 시편 속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3. 명상의 중요성

 

(1) 지성을 통한 숙고의 훈련

+ 명상은 기도에 있어서 지성적인 부분이 매우 강하게 작용하는 단계입니다. 명상에서 묵상으로, 그리고 관상으로 나아가는데, 명상 단계에서 자기 멋대로 받아들이면 나중에 힘들어집니다. 가능한 한 말씀의 정확한 개념과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명상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 단계를 쉽게 지나치면 단순히 '나는...처럼 느껴진다'로 끝나게 됩니다.

 

+ 명상에는 말씀을 (성경 전체의 파악과 개별 말씀의 의미를 포함하여) 배우는 시간이 걸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훈련은 평생 지속됩니다. 이를 위해 반드시 신학교에 갈 필요는 없지만, 가급적이면 말씀 묵상을 하는 분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 스포츠 선수가 끊임없이 연습하며 자신을 훈련하고 기술을 연마하고 경험을 쌓는 것처럼 시편 명상도 마찬가지로 전심전력을 필요로 합니다. 명상은 온 인격을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지성을 가지고 숙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세계에 사는 기쁨을 맛보는 세상-그것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마음의 충만함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의 바쁘고 분주하고 변덕스러운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 전념하는 자신의 시간을 되찾으려는 노력, 즉 의식의 전환, 삶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2) 하나님을 아는 것

+ 시편 명상의 여정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길과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경험했는지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특히 기도가 들리지 않는 것 같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실망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 시편 22편을 맛보면 이런 현실에 부딪힌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 이 시편의 저자는 기도할 때 세 가지 어려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기도해도 하나님을 느낄 수 없었던 것.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계속 기도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그러나 그는 기도에 있어서 이런 경험이 역사에서 자신에게만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 그는 모든 시대의 선조들이 남긴 '기도는 힘이다'라는 증거의 축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현명하게도 몇 달간의 개인적인 실패를 몇 세대의 민족의 경험을 무시하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기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본 결과, 기도의 문제는 아마도 기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기도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고, 같은 시편 22:21-22'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다짐합니다. 여기서 이 시편은 '탄식에서 찬송으로'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 이 말씀 속에 기도의 풍성함이 증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탄은 이런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기도를 아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의 삶을 세우려고 하면 사탄의 계략은 무너지게 될 줄 믿습니다. 사탄이 미워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갑시다.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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