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선용(善用)

 

갈라디아서5장

[13-14]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이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이루었음이니].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복음 안에서 이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케 하신 것을 말한다. 율법으로부터의 이 자유가 갈라디아서의 중심 주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는 의를 행하라고 주신 자유이지, 결코 죄를 지으라고 주신 자유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죄를 짓는 일에 쓰거나 자기 뜻대로 사는 일에 써서는 안 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하였다(6:12-13).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한다.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은 상대방이 나의 주인이요 나는 그의 종인 것처럼 서로 섬기라는 뜻이다.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하는 까닭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율법의 요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22:37-40). 사랑은 이웃을 섬기는 행위로 나타난다. 주님의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도왔고 섬겼다(10:33-35). 예수께서도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20:28).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며(고전 13:5),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것이다(15:13).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서로 물고 먹는다는 것은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남을 비난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데서 나온다. 미움은 마음의 살인과 같다.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은 서로를 죽이는 것과 같다. 그것은 피차 멸망하는 길이다. 그것은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국가에서도, 또 온 세계에서도 진리이다. 주께서는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12:25).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은 우리가 서로 헐뜯고 비난한다면 그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죄의 기회로 삼는 것이다. 성도도 때때로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으나 그가 계속 죄 가운데 머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 다른 성도를 계속 헐뜯고 비난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다(요일 3:9-10).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죄 짓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는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며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고 주신 자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성도들 간에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은 죄와 멸망의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http://www.oldfaith.net/01exposit/02nt/2-09갈라디아서.htm#5장: 자유자의 삶--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