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주의는 잘못이다.


 

갈라디아서3장강해 

율법주의란 사람이 율법을 행해야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생각이다. 바울은 율법주의의 잘못에 대해 일곱 가지 반론을 제시한다.

 

[1-2]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증거되었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누가 너희를 꾀어 진리를 복종치 못하게 하더냐?]6)

 

율법주의에 대한 첫 번째 반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이다. ‘진리는 은혜의 복음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며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대속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완전케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엑스 아코에스 피스테오스)[믿음의 들음으로]?

 

율법주의에 대한 두 번째 반론은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복음을 듣고 믿을 때이었다는 사실이다. ‘믿음의 들음으로라는 말은 사람이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을 가지고 듣는 것, 혹은 들을 때 믿음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고넬로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성령께서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고 증거한다(10:44).

 

[3-4]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율법주의에 대한 세 번째 반론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친다는 원어(에피텔레이스데)는 영어성경들처럼 완전케 된다’(KJV) 혹은 완전케 되고 있다’(NASB)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보인다. 한 영어성경은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한 후에 지금 육신적 노력으로 너희의 목표에 도달하려고 애쓰고 있느냐?”(NIV)는 뜻으로 번역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케 되려느냐?”는 말씀은 사람이 육신적 노력으로는 도덕적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한다. 성령으로 시작된 성도의 신앙생활은 육신적 노력으로 완전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갈라디아서 5:16에서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

 

더욱이, 갈라디아 교인들은 은혜의 복음을 받은 후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했다. 그들이 이제 은혜의 복음을 포기하고 율법주의로 나아간다면 그들이 당했던 많은 고난이 헛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받을 가치가 있는 고난을 받았지 헛된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다.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율법주의에 대한 네 번째 반론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성령의 기적들을 행하신 것이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을 때이었지, 율법을 행할 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본절의 능력이라는 원어(뒤나메이스)기적들이라는 뜻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율법을 지킬 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을 때 주어졌었다(3:12, 16).

 

[6-7]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율법주의에 대한 다섯 번째 반론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15: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증거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은 성경 원리에 맞다.

 

[8-9]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본절은 다섯 번째 반론에 대한 보충적 설명이다. ‘의로 정하신다는 원어(디카이오오)의롭다 하신다는 뜻이다. ‘너를 인하여라는 원어(엔 소이)네 안에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네 안에서] 복을 얻을 것이니라”(12:3)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복이 이방인에게도 적용될 것을 암시했다. 예수님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의롭다 하심의 복을 받는 것이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주의에 대한 여섯 번째 반론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 즉 율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27:26). 이 세상에서 율법을 항상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성도들이라도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11-12]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율법주의에 대한 일곱 번째 반론은 성경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2:4). ‘믿음으로라는 말은 행위로 혹은 법을 지킴으로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이다. ‘산다는 말은 영원한 삶을 가리킨다. 이 성경말씀은 복음의 원리에 맞고 율법주의에는 맞지 않는다. 율법은 믿음과 근원이 다르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율법으로 인해 살 것이나(18:5), 믿는 자는 그 믿음으로 살 것이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한마디로, 율법주의의 오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역사적이며 객관적이며 대리적이며 완전한 사역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는 완전한 의이었다(10:4).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은 의는 완전한 의, 곧 도덕적 완전이며 거기에 무엇이 더 첨가될 것이 없다. 그 의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속박과 저주와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누린다.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결과를 보인다. 그것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믿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둘째는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죄인들 속에 거하실 수 없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 속에 들어오셔서 거하시게 되셨다. 이 두 가지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결과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큰 복이다.

 

 

본문은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는 생각에 대하여 일곱 가지의 반론을 제시한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사람이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심은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전제한다.

셋째로, 사람은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 그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며(64:6; 13:23; 17:9) 또 우리가 경험하는 바이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성령의 기적들을 베푸신 것도 신자들이 단지 예수님을 믿을 때이었다.

다섯째로, 아브라함은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여섯째로,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

일곱째로, 성경은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율법주의 곧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생각은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죄인들의 유일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 안에 거해야 한다. 이것이 복음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만족해야 하며, 그 의 안에서 자유와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그 의 안에서 의롭고 선한 삶을 추구하며 실천해야 한다.

 

 http://www.oldfaith.net/01exposit/02nt/2-09갈라디아서.htm#3장: 율법으로부터의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