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진 자유

 

갈라디아서2장

[1] 14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사도 바울은 14년 후에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 일을 말한다. 이 일은 사도행전 15장의 사건을 가리킨 것 같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수리아 안디옥에 내려와 이방인들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크게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고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냈었다.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일을 위해 모여 많이 변론한 후,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는 등의 율법의 멍에를 메우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아마 이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사도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올라갔고 또 디도를 데리고 갔다. 바나바는, 사도행전에 보면, 처음에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원사도들에게 소개한 자이며(9:26),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이며(11:24), 바울을 안디옥에 초청해 함께 그 교회를 가르쳤던 자이며(11:25-26), 그 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자이었다(13:2-3). 디도서의 수신자인 디도는 헬라인이라는 것(3)과 그레데에 남아서 교회를 돌본 사역자라는 것(1:5) 외에는 성경에서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안디옥 교회 안에서 일어난 교리적 논쟁 때문이었지만(15) 또한 하나님의 계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 논쟁 중에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직접 지시하셨다는 뜻일 것이다. 사도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받은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목적은 그가 그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과 예루살렘 교회가 믿고 있는 복음의 내용, 즉 예수님의 원사도들이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과 같은 지를 대조하고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의 일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잘못된 내용을 전파하고 있다면 그의 모든 수고는 헛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믿고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바로 그 복음, 임을 확인하고 확신해야 할 것이다.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규례이었다. 그것은 남자의 생식기를 덮은 피부(foreskin, 양피, 포피)의 끝을 잘라내는 의식이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아야만 했다. 이것은 율법에 규정된 하나님의 언약의 표시이었다. 율법을 따른다면, 디도도 당연히 할례를 받아야 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새 언약 아래서 모든 사람은 할례와 관계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할례 받지 않은 헬라인 디도를 예루살렘에 데리고 올라감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거하기 원했던 것 같다. 특히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그 논쟁의 시점에 바울은 디도를 데려감으로써 행동으로 그 진리를 증거하려 했던 것 같다.

 

[4-5]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던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교회에 당당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이 마귀의 전술이다. 마귀는 자기 사람들을 비밀 첩보원처럼 가만히 교회 안에 투입시킨다. 오늘날도 기독교계 속에 많은 거짓 형제들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그들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들어온 목적은 사도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엿보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으려고 함이었다.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사도 바울의 표현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드러낸다. 그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할례의 규례와 의무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구약의 모든 의식적 율법들, 예를 들어 성전 의식들, 제사 의식들, 절기들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완전한 의를 이루셨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누리는 자유이다.

 

물론 그 자유가 도덕적 율법들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복음 안에 있는 자유는 방종에 빠지게 하는 자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행하게 하는 자유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우상숭배하지 말아야 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거짓 증거하지 말고 탐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도덕법들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기쁨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이지, 의를 이루기 위해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무거운 짐을 진 심정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가만히 들어와 사도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파괴시키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거짓 형제들은 기독교회 속에 들어온 유대교인들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유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오해한 자들이며,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아군들이 아니고 적군들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건설자들이 아니고 파괴자들이었다. 그들은 주께서 피흘려 사신 형제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고 실상 미워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긍휼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안에 사는 자들이 아니고 아직도 사망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 거짓 형제들을 알아차렸고 그들에게 한 순간이라도 복종치 않았다. 잠언 25:26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워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고 말한다. 진리를 가진 자는 진리를 가지지 못한 자 앞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 거짓 형제들의 사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진리와 배치되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 곧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이 진리가 자신뿐 아니라 자기가 전도하여 믿게 된 모든 성도들에게도 있게 하기를 원하였다.

 

[6-9]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8절은 문맥상 삽입적 의미를 가지며 어떤 영어성경들은 8절을 괄호 안에 두었다(KJV, NASB). ‘유명한 이들은 예루살렘의 원사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성경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매여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어떤 직분자보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형제 자매이며 한 식구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원사도들은 사도 바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계시로 주신 복음은 충족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원사도들에게 주셨던 그 동일한 복음 진리를 바울에게도 주셨다. 사도 바울의 복음과 열두 사도들의 복음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출한 그 복음의 내용은 바로 열두 사도들이 전파하였던 바로 그 복음이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감으로써 그의 복음에 어떤 수정이나 보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복음과 열두 사도들의 복음이 동일하다는 것이 증거되었을 뿐이다. 그들 상호간에는 교리적 일치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셨고 바울을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셨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 즉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 이 교제의 악수는 사도 바울의 복음과 사도 베드로의 복음이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다른 말로, 이 교제의 악수는 사도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라는 것을 증거한 것이다. 이렇게 확인된 그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이 세상에 없으며, 그 후 시대에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복음만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과 소망이 된다.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부탁한 것이 있다면 단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11:29에 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큰 흉년이 들어 유대에 사는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을 보내는 일이 있었다. 사도행전 15장 때에도 유대에는 가난한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구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전부터 자신도 그 일을 힘써 행하여 왔다고 증거한다. 선행과 구제는 하나님의 명하신 뜻이며(15:7-11) 하나님의 백성들의 당연한 의무이다(고후 9:13).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오늘 본문의 요점은 사도 바울이 증거한 복음의 내용이 사도 베드로가 증거한 복음의 내용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제의 악수로 상징되었다. 오늘날 불신앙적 신학자들은 성경 안에 다양한 신학들이 있고 그 신학들 간에는 때때로 갈등과 심지어 모순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사도 바울의 복음은 결코 사도 베드로의 복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복음 진리, 그들이 전파하고 가르쳤던 복음 진리는 동일하였다. 이 성경적 복음만이 오늘도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이 된다.

 

또 복음은 자유의 복음이다. 그것은 헬라인 디도를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한 바울의 행동에서 증거되었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는 모든 율법주의의 멍에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한다. 물론 이 자유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자유는 아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주신 참 자유, 곧 죄로부터의 자유, 율법의 멍에로부터의 자유를 소유하고 누려야 한다.

 

 http://www.oldfaith.net/01exposit/02nt/2-09갈라디아서.htm#2장: 복음 안에 있는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