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현대 교회의 문제는 교리적 배교와 타협과 혼동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윤리적 부패에서도 심각하게 나타난다. 특히, 교회들의 전통적인 경건한 예배 형식이 세속화 되고 육신적 즐거움을 만족시키는 오락적 요소들이 도입되고 있다. 현대 기독교 음악은 록 스타일과 랩 스타일을 도입하여 세속 음악과 구별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또 남녀 평등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와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안수하여 세우는 교단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교회들은 앞을 다투어 낙태를 정당화 하고 동성애를 용납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심지어 안락사를 인정하는 교회들도 나타났다.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계의 이러한 이상 풍조들을 분별하며 배격하고 교회의 순결성을 지켜 하나님께서 신구약성경에 교훈하신 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열린예배

1. 분석

1-1. 조영엽 박사의 증거

1-2. 릭 워런(Rick Warren)

1-3. 현대 교인들은 오락을 구함

2. 비평

2-1. 교회의 상업적 경영 방식(Marketing)

2-2. 20세기 교회 내의 실용주의(實用主義)

1. 분석

요즈음 일부 교회들에서는 '열린 예배'라고 하여서 교회의 전통적 예배 모범을 깨뜨리고 예배 시간에 멀티비젼(대형 자막에 비쳐지는 그림들), 드라마, 무용, 세속적 형식(락이나 랩 스타일)의 복음성가와 밴드, 혹은 심지어 청바지 형태의 복장을 도입하려는 경향이 있다. 또 어떤 교회들은 '문화학교'를 개설하여 영어 회화, 꽃꽂이, 바이올린 등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런 경향들은 일찌기 자유주의적 교회들에서 시도되었던 바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보수주의적 혹은 복음주의적이라고 하는 교회들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이 '영성'(靈性)이 있는 활동이며, 심지어 이런 교회들이 '사도적 모범을 좇는 교회들'이라고 선전된다. 또 이런 류의 교회들은 이런 방식으로 많은 청중들을 모으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대형교회가 목회의 성공이라고 인식하는 대중의 평가 방식에 이끌리어, 많은 목사들은 '여하튼 교회가 숫적으로 커지고 봐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1-1. 조영엽 박사의 증거

조영엽 박사는 열린 예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다(조영엽, 열린 예배란 무엇인가?).

열린 예배란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에 일찌기 없었던, 지금까지의 전통적 예배의식과는 전연 판이한 새로운 형태의 예배로서 이 시대의 세속적 문화와 표현방법으로 예배의 형태를 바꾼 세속화된 교회의 타락한 예배의 형태를 말한다. 열린 예배는 지금까지 지켜온 전통적인 예배 의식을 완전히 뜯어고친 새로운 형태의 예배 형식이다. . . . 열린 예배를 일명 "사랑의 공동체 예배"라고도 한다. 열린 예배라는 말은 영어의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에서 나왔는데, 그것은 불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한 예배 즉 이웃초청 전도집회와 같은 성격을 띤 예배를 말한다.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열린 예배를 보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메타 춰취'(meta-church)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메타 춰취'란 '전향하는 교회' 혹은 '되어가는 교회'라는 뜻으로 전통적 예배의식에 대한 사고 방식, 의식 구조, 예배 형태를 완전히 전환하는 교회를 말한다(Carl F. George, The Coming Church Revolution, pp. 26, 27). 죠지는 그의 또 다른 책 교회 성장의 장애물들을 파괴하는 법(How to break growth barriers) 제3부에서 열린 예배를 보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열린 예배에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물들을 다 제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외형적 구조의 변경도 강조한다. 강대상을 큰 강대상 대신에 작은 이동식 탁자로 대치한다. 의자는 등받침이 없는 것을 놓고 거기에 걸터앉는다. 강단을 무대로 전환하여 노래나 춤이나 연극을 할 수 있도록 요란스런 조명 세트를 장치한다. 조화 또는 생화로 강대상 좌우를 다 꽉 채운다. 대형 자막 또는 대형 전광판을 설치한다. 고도의 방송용 음향 장비를 설치한다. 에드 답손(Ed Dobson)은 그의 책 구도자 예배(Seeker Sensive Service) 제2부에서 열린 예배는 형식에 매이지 말 것, 현대적일 것, 강요하지 말 것, 편안하게 해줄 것 등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형식에 매이지 않기 위해 목사나 안내 위원이나 성가대원은 모두 청바지나 또는 가벼운 옷들을 입으며, 현대적이기 위해 전자 기타, 드럼들, 심벌즈, 키보드 등을 사용하여 기독교적 록 음악을 연주한다. 또 강요하지 않기 위해 공개적으로 초청하거나 앞으로 나오도록 하는 부담을 주지 않는다. 또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강대상 주변을 재단장하여 교회 강단처럼 보이지 않게 한다.

열린 예배 보는 사람들은 예배를 하나의 축제 개념으로 바꾸었다. 죠지는 그의 책 다가오는 교회 혁명(The Coming Church Revolution) 1부에서와 미래를 위해 당신의 교회를 준비하라(Prepare Your Church for the Future) 4부에서, 그리고 로버트 로간(Robert Logan)은 그의 책 교회 성장 저편에(Beyond Church Growth)에서 예배를 하나의 축제(event, festival) 개념으로 바꾸었다.

열린 예배를 보는 교회들은 찬송 대신 소위 현대 복음송, 현대 기독교 음악(CCM), 크리스챤 록 음악을 부른다. 새들백 커뮤니티 교회의 릭 워런(Rick Warren)은 크리스챤 록 음악을 '새 노래'라고 말하면서 새 노래를 부르라고 강조한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가 시무하는 교회가 현대 팝송과 록 음악을 채택한 이유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우리 교인의 96%가 성인 현대 음악을 듣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새들백 교회에서 우리가 사용하기로 선택한 주요 음악 스타일이다," "우리는 열린 예배에서 찬송은 더 이상 부르지 않기로 전략적 결정을 세웠다"(한역, 318쪽).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교회에 전도의 대상으로 정해준 종류의 사람들에게 맞는 음악을 선택해야 한다"(313쪽), "나는 음악의 스타일이 좋은 음악, 나쁜 음악이라고 판단될 수 있다는 의견에 반대한다. 누가 이것을 결정하는가?"(313쪽), "교회도 어느 한 특정 형태만 신성한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314쪽), "아주 다양한 형태의 음악을 통하여 메시지는 전달될 수 있다"라고 한다.

열린 예배를 보는 교회들의 대부분은 설교의 내용이 빈약하고 말씀에 은혜가 없다. 설교는 예화, 간증, 재담,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들로 가득 찼다. 하나님, 죄, 심판, 회개, 예수님의 속죄의 피, 믿음, 구원, 지옥 등의 근본 교리들이 강조되지 않는다. 또 거룩함, 고난, 인내, 영적 싸움 등이 강조되지 않는다. 열린 예배 보는 교회들은 때때로 연극으로 설교를 대신한다. 예를 들면 하와가 아담을 꾀이는 장면,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이는 장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는 장면,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상,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강간하는 장면 등을 재현할 때 어떻게 경건한 예배에 조화될 수 있겠는가?

열린 예배를 주창하는 자들은 목사를 목장주(Rancher)로, 신도를 고객(Customer)으로, 교회를 기업체(Enterprise)로 간주한다. 칼 죠지는 교회 성장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법(How to Break Growth Barriers) 제2부에서, 맥가반(McGavarn)은 교회 성장을 위한 이해(Understanding Church Growth) 제5부에서, 목사를 목장주로, 신도를 고객으로, 교회를 하나의 사(私)기업체로 간주하였다. 미국에서 열린 예배를 보는 대표적 교회들 중의 하나인 윌로 크릭 공동체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에 전화하면(미국 847-765-0070) '고객 서비스입니다'(Customer Service)라고 전화를 받는다.

1-2. 릭 워런(Rick Warren)

릭 워런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새들백 커뮤니티 교회의 목사이며 '목적에 이끌리는 교회를 건립하기' 연수회의 지도자이다. 1998년 1월, 워런은 한 세미나에서 전통적 교회를 극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로 변형시키려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1) 현대적 스타일의, 비(非)위협적 '구도자(求道者) 집회'가 전통적 일요일 예배를 대체해야 한다. (2) 복장은 평상복이어야 한다. (3) 음악은 현대적이어야 한다. (4) 설교는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똑같이, 종종 심리학과 격려적인 성경본문을 섞는 설교 후에, 자신들에 대해 좀더 기분 좋게 생각할 수 있도록 오직 긍정적인 내용이어야 한다. (5) 교회의 사역들은 대중의 필요들을 충족시키도록, 우울증, 무절제한 식사, 불임(不姙), 동성연애자들의 가족이나 친구, 낙태 후의 일, 별거(別居) 등을 위한 후원 그룹들을 가지고 준비되어야 한다. (6) 교리적 교훈은 일요일들에 교회 전체에게 주지 말고, 예배 시간과 별도로 소그룹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한다. (7) 실용주의적(實用主義的) 타협의 정신이 우세해야 한다(Foundation, 1998년 3-4월호). 그러나 이러한 세속적인 에큐메니칼 '구도자' 교회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을 편안하게 하고 즐겁게 할 지는 모르나, 그것들은 비성경적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6월 15일.)

릭 워런은 '구도자 집회'의 음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음악은 현대적이어야 한다. 음악의 가사들이 더 근래의 것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악의 스타일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날마다 듣는 것이어야 한다." 릭 워런의 새들백 커뮤니티 교회의 음향시설, 밴드, 노래하는 이들과 연주 등의 오락 구성물은 어떤 세속적 록 연주회의 것과도 경쟁할 만하다. 워런은 말하기를, 교회가 해야 할 첫번째 일들 중의 하나는 '오르간을 밴드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했다. . . . 교회 찬양대의 목적은 '독창 연주자를 배경음악으로 후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찬양대로 하여금 직접 노래하게 하는 것보다 그것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90년대의 방식이다'고 하였다." 워런은 또 말하기를, 몰아대는 비트를 가진 큰 소리의, 쉰 목소리의 음악이 그의 회중들이 듣는 종류의 음악이라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주말 집회 때 정말, 정말 소리가 크다. . . . 나는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낮추지 않을 것이다.' 자 그 이유는, 어린아이 같은 대중들은 음악을 느끼기를 원하지, 단지 그것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전통적 음악의 사용을 주장하는 것을 우상숭배의 죄와 동일시 하였고 또 부언하기를, "모든 좋은 음악이 200년전 유럽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얇게 덮인 인종차별주의 . . . 문화적 엘리트 의식이다"라고 하였다. (Foundation, 1998년 3-4월호; Calvary Contender, 1998년 6월 15일.)

팀 포터 목사는 "영적이지 않고도 성공적인 방법"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릭 워런의 방법들과 그의 책 목적에 이끌린 교회(The Purpose Driven Church)의 내용들을 검토한다. 워런의 책은 W. A. 크리스웰의 서문과 더불어 로버트 슐러, 빌 브라이트, 풀러 신학교 교수 아치볼드 하트, 그리고 연합감리교회의 에스라 얼 죤스의 찬동을 얻었다. 포터는 몇 가지 철학적 및 신학적 결점들과 기타 문제점들을 열거한다. 그는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장사술에 이끌린 목회 사역은 불신자의 요구에 응하므로 결국 불신앙에 이르게 될 암(癌)이다"라고 하였다. (Visitor, 1998년 8월호; Calvary Contender, 1998년 10월 1일).

1-3. 현대 교인들은 오락을 구함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 시설들, 그들의 가족들을 위한 프로그램들, 그리고 오락을 위해 교회를 찾고, 신학이나 신앙사상을 위해 교회를 찾지 않는다. 그들은 기독교적 사회활동(YMCA 같은)이나 종교적 록 콘서트의 혼합물을 찾고 있다(Christian News, 1999년 5월 10일). 슬프게도, 대형교회의 흥미 추구자들은 바른 교리와 거룩한 생활에 낮은 우선 순위를 준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6월 15일.) 성경은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말씀했다(딤후 4:3).

2. 비평

그러나 이런 류의 교회 형태, 목회 형태는 심히 불성실하고 인위적이다. 우선, 정말 '열린 예배'의 형식이 바람직한 것이라면, 먼저 기도와 성경연구와 신중한 토론을 통해 목사들의 임직 서약 때 하나님 앞에서 수락했던 '예배 모범'을 먼저 고쳐야 할 것이다. 어떻게 목사들이 신앙양심의 거리낌 없이, 하나님 앞에서 서약으로 수락했던 예배 모범과 역행하는 예배 형식을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는가?

또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엄숙하고 질서 있게 행해지고 예배 음악들이 아름답고 안정되게 연주되는 것이 과연 합당하지 않은가? 성경은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라고 말씀했다(시 96:9). 또 바울 사도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라고 말했고(고전 14:33), 또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빌 1:9, 10). 우리는 질서 있고 가장 아름답고 선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

또 성경은 분명히 예배의 순서가 찬송과 기도와 설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을 보이고 있다. 고린도전서 14:26,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런 말씀은 전통적 예배 의식이 성경적임을 보인다.

또한, 교회의 문화적 행사들은 성경의 교훈들에도, 초대 교회의 모범에도 맞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본연의 임무와 사명이 있다. 그것은 예배와 영적 성장과 전도의 일이다. 특히, 전도는 예수님 자신의 사명이었고, 그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일이었다. 초대 교회는 이 임무들과 사명에 충실하였다. 어느 시대이든지, 교회는 오직 이 임무들과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성경은 단지 개인의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만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 아니고, 또한 교회 생활과 목회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우리는 인간적 생각과 지혜로 예배하거나 교회를 운영하지 말고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가르침에 의지하여 예배하고 목회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심히 혼란스런 오늘날 교회들의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지시하는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우리 모두는 성경이 보이는 대로 교회를 운영하고 목회해야 한다.

2-1. 교회의 상업적 경영 방식(Marketing)

1999년 7월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WCF)의 한 결의문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접촉하고 '구도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세속적인 상업적 경영전략들(예를 들어, 헐리우드 영화들, 록 음악)을 사용하는 일부 목사들에 대해 경고하였다. 그 결의문은 "바로 이 사람들, 특히 에드 답슨이 근본주의자들과 성경적 분리주의자들을 율법주의자들이라고 지칭한다"고 말했다. 그 결의문에 의하면, "이 상업적 경영방법론은 미국에서 빌 하이벨즈와 릭 워런 같은 사람들의 영향을 통하여 시작되었으나, 온 세계의 복음주의자들을 통해 급속히 퍼져 나가고 있다." 그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 결의문은, "근본주의자들은 사도행전 2:41-47의 교회예배형태를 따르고, 요한1서 2:15-17의 경고에 주의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일.)

2-2. 20세기 교회 내의 실용주의(實用主義)

보이스(Voice)지 1999년 12월호의 한 글은 오늘날 교회들의 풍조를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많은 교회들이 프로그램으로 기도를, 사람들로 능력을, 오락으로 참된 예배를, 번영으로 순수성을, 조직체적 일치로 더럽혀지지 않은 복음에 대한 충성을 대치하였다. . . . 실용주의(實用主義)가 하나님의 백성의 생각을 엄습하여 교회에서 교인수가 느는 것이 복(福)의 기준으로 간주되고 교회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을 취하든지 정당화 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에 사람들을 포함시키려는 이 과정을 방해할 모든 것을 제거하는데 큰 강조점을 둔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으로 재(再)정의된다. 칭의(稱義)의 교리가 매우 교묘하게 정의됨으로써 천주교인들은 교회를 연합시키려는 노력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거룩에 대한 이해는, 사람이 생활방식 때문에 용납할 만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조화되지 않는 것으로 비난받지 않도록 조정된다.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과 접촉함'이라는 공통적 목표가 본질적 신학 영역들에서의 교리적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일치의 기초가 된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1월 15일.)

현대 기독교 음악

1. 분석

2. 비평 / 2-1. 조영엽 박사의 증거

1. 분석

오늘날 교회 음악은 급속히 변질되고 있다. 이전에 술집이나 댄스 홀에서 들을 수 있었던 종류의 음악들이 버젓이 교회 안에서 연주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이미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그 증거를 수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최근의 몇 가지 예들을 들어보자.

죤 비새그노 박사의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제일침례교회(남침례교단)는 그 교회의 솔리드 록 카페에서 1994년 행사로 엘비스 대회와 비틀즈 음악 연주를 가졌다. 알 엘 히머즈(R. L. Hymers) 2세 박사는 죽어가는 국가를 향한 설교(Preaching To A Dying Nation)라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단지 이 저녁 예배가 완전히 은사주의적이라고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 . . 안내 위원들은 귀걸이를 하고 짧은 바지와 모자를 쓴 남자들이었다. . . . 우리는 나이트 클럽이나 록 컨서트나 마약 소굴에 들어왔을 때 느꼈을 것처럼 부적절하다고 느꼈다. . . . [그러나] 그 교회는 남침례교단 안에서 '보수적' 교회들 중의 하나라고 간주된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10월 15일.)

미국 남침례교단의 W. A. 크리스웰 목사는 달라스의 역사적 제일침례교회의 원로목사이며 경건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달라스 모닝 뉴스(Dallas Morning News) 1998년 8월 1일자의 한 글에서 달라스 제일침례교회에서 케이던스(Cadence)라는 새로운 청년 사역을 시작한 7월 25일 하드코어-어돈(Hard-Core-a-Thon) 연주회 동안 그 밤에 젊은이들은 떠들석하게 춤을 추었으며, "떠들석한 춤과 천둥 같은 기타들과 크리스챤의 경건으로 어울러진" 그 연주회로 인하여 "달라스 제일 침례교회의 부속건물인 그 장엄한 스펄젼 해리스 빌딩은 흔들린 것 같았다"고 보도되었다. (Fundamentalist Digest, 1998년 7-8월호; Calvary Contender, 1998년 9월 1일.)

미국 남침례교단에서는 2000년 신년 전야제가 유스링크(YouthLink) 2000의 7지역들에서 3일밤, 2일낮 밀레니엄 축제로 치루어졌었다. 4개의 남침례교 기관들에서 후원한 이 행사는 남침례교 역사상 가장 큰 청년 모임이었다(Sword of the Lord, 2000년 2월 18일). 그 모임은 4만 6천명 이상의 남침례교 청년들을 모았고 그들은 미국 내에서 알려진 '기독교' 록 밴드들에 의해 귀가 찢어지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찬양과 예배 음악을 즐겼고 약 새벽 2시까지 웃으며 노래하며 소리치며 춤추었다고 한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3월 15일.)

은사주의와 신복음주의 계열들에서 흔히 세속적, 관능적 현대 기독교 음악(CCM)과 단정치 못한 복장을 특징으로 하는 춤에 대한 경향이 있는 것은 슬픈 일이며, 그것은 어떤 근본주의적 교회들 속에도 침투하기 시작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많은 교회 음악들도 기독교적이지 않고 세속적이게 보인다. 기독교 방송국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들, 기독교 서점들에서 파는 찬송 테이프들 가운데 그런 것들이 적지 않다. 많은 교회 음악들이 리듬이나 템포에 있어서 세속 음악과 비슷해졌다. 째즈나 록 스타일의 경박한 음악들이 교회 속에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기도원들에서 연주되는 밴드나 전도집회시 세우는 밴드들은 완전히 세상적인 기분이 든다. 심지어 신학교들에서도 그런 류의 밴드가 연주되고 그런 류의 노래들이 불리워지고 있다. 경건하고 아름다운 교회 음악이 큰 도전을 받고 있다.

2. 비평

음악은 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경에 의하면, 음악은 하나님을 섬기는 한 방법이다(시 150편; 엡 5:19). 그러나 음악은 또한 옛날부터 이방 종교들이나 우상 숭배들과도 관계가 깊었다(출 32:17-19; 단 3: 5).

하나님은 경건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요구하신다(시 96:8, 9).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을 정죄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헛된 노래를 금하셨다(출 20:7; 암 6:5). 그러나 이방 종교들이나 우상 숭배들은 육신적인 음악, 무질서와 광란의 음악을 사용하였다.

현대 기독교 음악(CCM)의 다수는 크리스챤 록 음악이다. 복음송들의 다수도 그러하다. 그러면 록 음악이란 무엇인가?

록 음악은 1950년대에 생긴 것으로서 50년대에 엘비스 프레슬리와 60년대에 비틀즈로부터 80년대 마이클 잭슨까지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음악 형태를 가리킨다.

2-1. 조영엽 박사의 증거

조영엽 박사는 현대의 록 음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증거하였다(조영엽, 열린 예배란 무엇인가?).

록 앤드 롤(rock and roll)이란 명칭은 미국의 방송 음악 진행자이었던 알란 후리드(Aland Freed)가 처음 사용한 용어이었는데, 성적, 육체적 움직임을 표현한 말이다(Webster's New World Dictionary, 3판, p. 1161; O. T. Spence, Straightway, vol. 25, p. 3). 시카고 대학의 알란 블룸 교수는 말하기를, "록 음악은 오직 한가지인 성적 욕망에만 마음을 끈다"고 하였다(Allan Bloom, 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 <1987>, p. 73).

역사적으로, 록 음악은 블루스, 컨츄리 음악, 리듬 음악 등이 혼합되어 생겼다. 블루스는 미국 동남부 흑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흑인들의 대중 가요이다. 블루스 음악의 가사들은 대부분 노예, 가난 등의 슬픈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곡들은 재즈의 형태를 취한다. 몸을 율동적으로 움직이면서 트롬본이나 섹스폰 같은 악기들을 연주하며 쉰 목소리 같은 음성으로 노래를 부른다. 리듬 음악은 몸을 좌우로, 앞뒤로, 상하로 강하게 떨며 흔들며 움직이며 성적 자극이 있게 부른다.

여기에서 나온 록 음악의 한 특징은 고음(高音)이다. 록 음악은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고음으로 사람들의 혼을 뺀다. 대형 제트 비행기는 이륙시 대략 120 데시벨(db)의 소음을 내며, 천둥 번개의 최고 기록은 약 125 데시벨인데, 록 콘서트에서의 고음은 대략 130-140 데시벨이라고 한다(Frank Garlock and Kurt Woetzel, Music in the Balance, p. 153). 록 음악의 다른 한 특징은 반복이다. 반복 자체만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저질적 가사 내용들, 노래 부르는 사람들의 미친 듯한 고함 소리, 기타, 드럼, 심벌즈 같은 악기들의 요란한 소리들이 계속 끊임없이 반복될 때 사람들은 록 음악에 도취하게 된다. 반복은 최면 효과를 가져온다.

록 음악에서 중요한 다른 한 특징은 비트(박자)이다. 록 음악에 있어서 강하게 몰아치는 비트, 성적 자극을 일으키는 비트 그리고 부정적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비트 등은 다른 모든 형태의 음악들과 구별된다. 찰스 브라운은 "아마도 록 음악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은 비트이다. 록 음악은 비트 때문에 다른 음악들과는 구별된다"라고 말하였다(Charles T. Brown, The Art of Rock and Roll, 1983. p. 42). 이를 위해 록 음악에서는 드럼, 심벌즈 등과 더불어 기타가 주 악기로 사용된다.

록 음악의 비트는 강하게 몰아붙이는 비트와 약약강격(弱弱强格, ana- pestic) 비트이다. 약약강격 비트란 박자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고 역행하는 반항적 박자를 가리킨다. 박자의 기본 원칙은 "강"이 첫 박자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4박자는 강-약-중강-약이 된다. 그러나 록 음악은 박자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고 약박자가 먼저 나온다. 또 록 음악의 비트는 성적 흥분을 유발시키는 비트이다. 이러한 비트들은 기존 질서와 권위에 대한 도전과 반항, 옳은 것에 대한 거부, 긴장감과 압박감, 퇴폐, 음란, 성적 욕망 등을 일으킨다.

과연 록 음악의 내용은 성적 음란,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 술취함, 난폭, 폭력, 파괴, 마약, 환각, 동성애, 무질서, 허무, 자살, 사탄 숭배 등이다. 록 음악에는 규칙, 도덕, 법, 철학, 진리가 없다고 지적된다. 특히 사탄 숭배에 관하여 70년대는 역행 은폐(backward masking)의 방법을 사용했으나, 80년대는 보다 노골적이다. 예를 들어, 블랙 오크 알캔자스, 앨범 '라이브 론친롤,' '알캔자스에 전기가 들어왔을 때'--"사탄, 사탄, 사탄, 그는 신이다. 그는 신이다. 그는 신이다." 그룹 AC/DC, '처음 느낀 사랑의 감정'--"우리는 악마를 섬긴다. 즐겨라, 죄인들이여." ("내곁에 도사린 사탄의 두 얼굴," 크리스천 한국, 1993년 8월 25일, 1, 2쪽.)

1950년대 초에 처음 등장한 이후, 록 음악은 청소년 층을 중심으로 전세계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그것은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이며 인기가 있지만, 도덕적, 사회적, 종교적 영역에서 가장 무서운 악영향을 주고 있다. 록 음악은 거칠고 난폭하며 혼란한 소리이며 저속하고 사람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최면 효과를 일으켜 사람을 열광에 빠지게 하고 청각에 손상을 주며 예술적 가치는 전혀 없다.

세속적 록 음악의 영향을 받는 현대 기독교 음악(CCM)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현대 기독교 음악의 대다수는 크리스챤 록 음악이다. 그것은 리듬이나 화성이 세속적 록 음악과 비슷하다. 곡의 작곡 형식이 전통적이지 않고 세속적 록 음악과 같다. 그것은 전통적 클라식 음악이 가지는 질서와 안정과 아름다움을 중시하지 않는다.

리듬에 있어서 그것은 약약강격을 많이 사용하고, 화성에 있어서 그것은 "도미솔, 도화라, 시레솔"의 정상적 3화음을 좋아하지 않고 불협화음들을 자유로이 사용하므로 육감적, 세속적 기분이 든다. 가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곡에 있어서 그것은 세속 음악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O. T. 스펜스 박사는 "가스펠 록(gospel rock)은 육신적 음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하였고, 복음송에 대하여도 "가스펠 록이 거의 모든 복음송에 들어가 있다. 이 노래들은 경험, 느낌, 감상적(感傷的)인데 근거하고, 대부분 은사주의자들이 만든다"고 논평했다(1993년 10월 24일, 잠실동교회 주일낮설교). 또 그는 "현대 기독교 음악(CCM)에 젖으면 몇 년 후에 세속적 록 음악으로 간다"고 말하였다.

록 음악에 오랫 동안 몸담았던 리차드 펙은 우리가 부드러운 록 음악(soft rock)이라도 배격해야 하는 까닭은, ① 부드러운 록 음악도 메시지가 항상 부드러운 것이 아니며, ② 연주자가 그것을 흔히 온건하게만 연주하지 않으며, ③ 그것은 여하튼 록 음악의 맛을 들게 만드며, ④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기 위해 결국 록 음악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ichard Peck, Rock: Making Musical Choices).

덧붙여, 오늘날 현대 기독교 음악에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보다 사람이 높임을 받는 경향도 없지 않다. 또 실제로 크리스챤 록 콘서트에 돈을 받음으로써 상업적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오늘날 크리스챤 록 음반 사업은 큰 사업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현대 기독교 음악(CCM) 혹은 크리스챤 록이나 그런 류의 복음송들을 경계해야 한다. 쏟아져 나오는 복음송들의 곡들과 가사들을 검토, 평가하고 우리 교회들의 청년들과 청소년들을 위해 건전한 것들을 정선하는 것은 오늘날 보수적 교회들의 큰 과제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복음송들을 무분별하게 아무 것이나 부르지 않고 좋은 것들을 부를 수 있도록 지도해주어야 한다. 물론 록 스타일의 곡이나, 비성경적이거나 별 의미가 없는 가사는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과 청년들에게 옛날부터 즐겨불렀던 찬송가들을 부르도록 권면해야 하겠다. 그리스도인들의 찬송이나 영적 노래들(엡 5:19)은 가사와 곡에 있어서 건전해야 한다. 그 가사는 성경 교리에 합하고, 복음의 내용을 가진 것이어야 하고, 그 곡도 경건하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 빈번한 불협화음들을 피하고, 단조(短調)도 너무 많이 사용하지 않아야 해야 한다. 소리를 너무 크게 하거나 속도를 너무 빠르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성도들의 음악과 노래는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부르는 것이므로 결코 자기만족적이거나 자기도취적이어서는 안된다.

남녀평등주의

1. 분석

1-1. 커버넌트 신학교의 제람바즈 교수의 남녀평등주의

1-2. 미국의 여자 목사들의 증가

1-3.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의 여성 안수 가결

2. 비평

1. 분석

오늘날 교회들 안에는 남녀 평등주의 사상이 많이 들어와 있고 이것은 특히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예들은 많지만, 최근의 몇 가지 예들을 들어본다.

1-1. 커버넌트 신학교의 제람바즈 교수의 남녀평등주의

1997년 라브리 청년대학생 수양회의 '세상 속의 일그러진 성'이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미국 커버넌트 신학교 변증학 교수이며 프란시스 쉐퍼 연구소 소장인 제람바즈 교수는,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남성이 해야 할 일과 여성이 해야 할 일에 관하여 구분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돕는 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성경말씀은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구분하는 의미가 아니고 동등한 위치의 남성과 여성으로서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남녀는 동등한 관계를 맺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연합신문, 1997년 1월 19일, 15쪽.)

1-2. 미국의 여자 목사들의 증가

미국 뉴스와 세계 소식(U. S. News & World Report) 1998년 8월 10일자는 "하와에 의한 성경"이라는 특별 기사에서 "여성들은 약 80개의 기독교단들에서 목사직에 그리고 보수파와 개혁파와 재건파 유대교에서 랍비직에 용납된다. 여성들은 신학교 프로그램들 안에 있는 모든 학생들의 3분의 1에 이른다"고 했다(Calvary Contender, 1998년 9월 1일).

미국 연방 노동청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서 자신을 '성직자'라고 묘사하는 여성들의 숫자는 1983년과 1996년 사이에 27,134명 증가하였다. 1983년에는 그 숫자가 16,408명이었으나, 1996년까지 여성 '성직자'의 숫자는 43,542명으로 늘었다. 이것은 여성들이 미국의 모든 성직자들의 12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David Cloud, "Number of Ordained Women Grows Phenomenal- ly," in Christian News, August 10, 1998, p. 26).

1997년에, 229개의 북미 신학 대학원 학생들의 30퍼센트는 여성이었는데, 그것은 1972년의 10퍼센트와 비교할 때 크게 증가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개신교 감독교회 신학교와 디스트릭에 있는 연합 감리교회의 웨슬리 신학교는 학생들의 절반이 여성이다(Ibid.).

1-3.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의 여성 안수 가결

1994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총회는 701대 612로 여성 안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예장 통합측은 대한기독교감리회(기감측)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측)와 더불어 한국에서 자유주의적 교회들의 노선을 다시 한 번 더 드러내었다.

2. 비평

오늘날 점차 많아지고 있는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에 대한 주장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세속사회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이런 생각이 복음주의적 신학교 안에서 가르쳐지고 기독대학생들과 청년들에게 퍼진다는 것은 대단히 슬픈 현상이다.

여성 안수을 주장하는 자들의 근거는 대개 다음과 같다. (1)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여성 사역자들이 있었다는 점(예를 들어, 여선지자 드보라, 미리암, 전도자 빌립의 딸들, 브리스길라, 뵈뵈 등), (2)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는 갈라디아서 3:28의 말씀은 남녀 평등의 원리를 가르친다는 점, (3) 세속 사회도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데 하물며 교회가 시대 조류를 역행할 수 있는가라는 주장, (4) 교회 내의 여성들의 은사를 활용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위의 반론들에 대하여 우리는 그러한 생각들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믿고 행동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상 변칙적으로 허용하신 것과 교회의 정식적 규범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밝히 가르치고 있으며 지금까지 성경을 믿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왔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인간적, 시대적 생각을 버리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사람의 창조기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돕는 자]'을 지으셨다(창 2:18). 이 기사가 분명히 보이는 바는 하나님께서 여자를 먼저 만드시고 그를 위하여 남자를 만드신 것이 아니고,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그를 위하여 여자를 만드셨다는 점이다. 여기에 남녀의 역할의 구분이 있다. 여자는 남자를 위하는 역할, 돕는 역할을 하도록 창조된 것이다.

물론 이것이 남편이 아내를 마음대로 지배하고 학대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둘은 한 몸이요 참된 사랑의 관계이다. 남편은 아내를 아끼고 사랑해야 하며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 둘의 관계는 한 편이 다른 편을 위하는 관계이고 순종하는 관계인 것이다.

신약성경은 결코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 가르치는 디모데전서 2:11-14과 고린도전서 14:34-37은 여자 목사직과 여자 장로직을 금하는 다섯 가지의 이유들을 밝히 제시하였다.

디모데전서 2:11-14,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이 구절은 여자의 가르치는 일(목사직)과 다스리는 일(장로직)을 명백히 금하고 있다. 이렇게 금하는 이유들은 두 가지이다: ① 창조의 질서 때문이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자는 남자의 협조자(helper)로 창조되었다. ② 여자의 범죄에 대한 징벌 때문이다. 인류의 타락시 아담은 여자가 선악과를 줌으로 그것을 먹고 범죄하였다. 창세기 3:6,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러므로 이제 여자는 또다시 나서서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제약을 당한다는 뜻이다. 이 두 이유들은 다 어떤 시대적, 환경적 요인들이 아니고, 역사적, 불변적 사실들이다.

고린도전서 14:34-37,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너희의 아내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여기에서도 여자들이 교회 앞에 나서서 말하고 가르치는 것을 허락지 않고 있다. 그 이유들은 ① 율법의 말씀이기 때문이다(34절, "율법에 이른 바와 같이"). 어떤 율법을 가르치는가? 예를 들면, 창세기 2:18,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창세기 3: 16,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세기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② 주의 명령이기 때문이다(37절, "주의 명령인줄 알라"). 에베소서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베드로전서 3:1, 5-6,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 . .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사도들(바울과 베드로 등)의 교훈은 곧 주의 교훈이다. ③ 교회의 보편적 규율이기 때문이다(34절,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위의 두 구절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교훈을 옛 시대의 사고방식과 풍습에 제약을 받은 사도의 인간적 말로 보는 것은, 거기에 제시된 다섯 가지의 이유들의 정당성을 무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글인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항하는 큰 오류요 죄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박형룡 박사는 이것이 2천년전의 한 지방 교회의 풍습이 아니고 만고 불변의 진리라고 밝히 강조했다(145-148쪽).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신학자들이 인용하는 다음 성경 구절들은 위의 성경 진리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1: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갈라디아서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구절들은 직분에 있어서의 남녀 평등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은혜와 구원의 복을 받음에 있어서 남녀가 동등하다는 뜻이다. 신약의 만인 제사장 진리도 가정과 교회 안에서 남녀 역할의 차등의 진리와 배치되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신약시대의 복음 사역에 여자들의 역할이 컸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누가복음 8:2, 3,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직이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예수님과 12제자들)를 섬기더라." 로마서 16장에는 뵈뵈, 브리스길라, 마리아 등 복음을 위해 많이 수고한 여자들의 이름이 언급된다. 그 뿐 아니라, 여자에게는 자녀 출산과 양육이라는 특별한 사역이 있다. 디모데전서 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이 구절은 여자가 해산을 통해 그의 낮은 지위가 회복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훌륭한 남자 배후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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