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의 대명사 리차드 백스터

- 영혼을 움직인 설교자 -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가 살던 17세기 영국은 급격한 변화로 인해 정치와 종교라는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균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종교와 사상에서는 새로운 물결이 용솟음치게 된다. 이 당시 영국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안전’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종교적인 영향으로 흘러 16세기 대륙에서의 종교개혁의 흐름을 타고 종교적인 열정을 갖게 된다. 그 열정은 신비주의, 휴머니즘, 범신론의 사상을 낳았다. 청교도는 이런 사상적 흐름 속에서 청교도 운동을 통해 형성된 신교사상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청교도(The Puritan)는 ‘교회를 깨끗하게 정화하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국교회는 국교도 기도서와 예배의식, 예복 등의 준수를 요구했다. 그리고 이런 요구에 반대한 사람을 ‘청교도’라 칭했다. ‘청교도 운동’(The Puritan Movement)은 바로 이들 청교도들에 의해 펼쳐진 종교적 개혁운동을 말한다. 청교도주의(Puritanism)는 청교도 운동의 과정에서 나타난 청교도의 정신과 사상 일반을 일컫는 말이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칼빈의 종교개혁 등이 다시 17세기 영국이라는 용광로를 통하여 이루어진 신교사상이다.

청교도주의는 영국교회의 얼굴을 개혁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청교도주의자들은 성공회라는 영국 국교회를 세우기보다, 개혁의 기본적은 원리들을 더 고무시켰다. 리차드 백스터는 청교도의 절정을 이룬 대표적인 사람이다.

 

혼란한 시기의 생애
리차드 백스터는 청교도 역사에서 독보적인 이름이다. 이는 지성이나 학식의 능력에 의하여서라기보다는 다소 덕스러운 성품에 의한 것이다. 백스터의 생애는 세 단계로 나뉜다. 초창기(1615-1646)와 키더민스터(Kidderminster)에서의 목회 기간(1646-1660) 그리고 후반기(1660-1691)다.

리차드 백스터는 1615년 11월 12일 스롭셔(Shropshire)에 있는 로우톤(Rowton)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존경을 받는 분들이었지만, 매우 가난했다. 백스터는 허약한 체질을 가졌다. 따라서 거친 육체노동에는 부적합했다. 그러나 지적인 정확함과 열심이 학문적인 추구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학문적인 교육을 보장받을 그 어떤 수단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오직 독서로 지적인 수준을 향상했다.

그는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의『상한갈대』(Bruised Reed)를 읽고 중생을 체험했다. 이 책은 그의 아버지가 사준 것이다. 백스터는 형편상 대학을 가지 못했다. 대신, 로드로우(Lodlow)에 있는 윅스테드(Wickstead) 목사로부터 1년 반 동안 생활하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그는 수많은 독서를 하게 된다. 그 후 청교도의 거장 존 오웬(John Owen) 밑에서 공부했다.

그는 23세 때 웨체스터(Worcester)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듀드레이와 보링게노스에서 설교했다. 그래서 164l년 키더민스터의 부목사이자, 강사가 되었다. 이때 시민전쟁이 발생했다(1642). 대부분의 웨체스터(Worcester) 사람들은 왕당파였으나, 백스터는 의회 군대 목사로서 짧은 기간 동안에 두 번 봉사했다. 그는 크롬웰에 반대를 표현했고, 영국에서 군주제를 없앤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647년부터 1660년까지 담임목사로서 그는 열정적으로 목회에 전념하게 된다. 1659년 크롬웰이 죽자 다시 왕정이 복귀 되면서 영국교회는 성공회의 감독제도로 환원되었다.

1660년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자, 성공회주의자들이 권한을 잡고 비국교도들을 성직자 명단에서 퇴출시켰다. 백스터는 감독제도를 선택할 것을 촉구 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리하여 성직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1662년 영국 국교회의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이 있은 이후, 영국 국교회에서 추방당하고 설교권까지 박탈당했다. 그는 이때 마가렛 찰튼(Margaret Charlton)과 결혼한다. 1685년 그는 악명 높은 제퍼리(Jeffreys) 판사 앞에서 설교 소란죄로 심문을 받고 정죄를 받아 감옥에 감금되었다. 그는 거기서 그의 작품을 저작하며 18개월을 보냈다. 결국 나쁜 건강을 이유로 석방(왕의 사면) 되었고 점차 쇠약해져 1691년 2월 8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리차드 백스터는 이처럼 매우 혼란한 시기에 살았다. 그의 생애는 제임스 1세, 찰스 1세, 올리버 크롬웰, 찰스 2세, 제임스 2세, 오렌지의 윌리엄 때까지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또한 어릴 때부터 병약한 체질과 싸워야 했다. 이러한 기질이 그로 하여금 많은 저작활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리차드 백스터의 설교 및 저작들
리차드 백스터는 목사요, 설교가요, 저술가다. 그의 천재성과 관대한 정신은 140여 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의 저술들은 라틴어와 영어 논문으로부터 가족들을 위한 단순한 요리(要理)문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650년에 그는 첫 작품 『성도의 영원한 안식』(Saints' Everlasting Rest)이 출간했다. 곧이어『참된 목자』(Reformed Paster, 1656), 『회심에 대한 논문』(The Treatise of Conversion, 1657), 『회개하지 않은 자에 대한 부르심』(A call to the Unconverted, 1658), 『확실한 회심을 위한 지시와 설득』(Directions and Persuasions to a Sound Conversion, 1658)을 출간했다.

『연약하고 병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지시』(Directions for Weak, Distempered Christians, 1669),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상을 못 박는 것』(Crucifying the World by the Cross of Christ, 1658), 『보편적 통일』(Catholic Unity, 1659), 『자기부정』(Self-Denial, 1660),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발견자의 헛된 신앙』(The Vain Religion of the Formal Hypocrite Detected, 1660), 『자기 무지의 해악』(The Mischiefs of Self-ignorance, 1662), 『신령한 삶』(The Devine Life, 1664), 『신앙의 생활』(The Life of Faith, 1670) 등을 집필했다. 가족이 필히 휴대해야 할 참고서『기독교 훈령집』(Christian Directory, 1673), 『빈자의 가정서』(Poor Man's Family Book, 1674), 『가정교리문답』(The Catechizing of Families, 1683) 등도 썼다.

그의 글은 대부분 논문 형식으로 되어 있다. 논문 주제는 목회적인 지도, 그리스도인의 연합 그리고 다양한 취미들에 관한 것과 의학, 과학, 역사에 관한 것을 총망라한다.

 

리차드 백스터의 설교 세계
백스터가 설교에 쏟은 정열은 대단했다. 그는 설교자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무르고, 그 은혜가 회중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설교자야말로 철저한 준비를 통해 설교단 위에 올라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설교를 연구하는데 있어 우리는 너무도 태만합니다. 우리는 청중을 확신시키고 그들의 속에 들어가는 법과 각각의 진리를 철두철미하게 전달하는 법을 연구해야 하며, 그러한 일들을 즉흥적으로 처리하고자 하여서는 안됩니다. … 최선을 다하여 설교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설교를 경시하고 진지하지 못한 태도로 설교에 임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신문구, 세계명설교대전집, 제2권, 379).

그의 설교는 강력한 열정이 뒷받침되어 이루어졌다. 탁월한 설득력과 긴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고, 종종 상반되는 개념들을 열거함으로 설교를 진행시켰다. 이러한 설득적인 설교의 압도적인 열정은 잃어버린 영혼을 돌아오게 했다.

그의 설교 스타일은 힘 있고 꾸밈이 없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항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충격을 받았다. 설교의 초점은 항상 복음전도에 강조점이 맞추어졌다. 그의 책『참된 목자』에서도 복음을 쉽고 간단하게 가르쳐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진리는 빛을 사랑하기에 벌거벗었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진리를 숨기는 것은 그가 시기심 강한 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표징이 된다. 진리를 숨기면서도 진리를 드러내는 척 하는 것은 위선자의 행동이며, 따라서 빛을 차단하는 색 유리와 같이 색칠을 한 애매모호한 설교는 그 설교자가 허식적인 위선자임을 드러내는 표시가 된다”(『참된 목자』, 133).

백스터는 되도록 평이한 말들을 사용하고자 노력했다. 이를 통해 훌륭한 화술을 얻게 되었다. 심지어 인쇄된 설교들조차 교육을 받았건 안 받았건, 가난하건 부자이건 간에 모든 계층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훌륭한 화술을 보여주었다.

또한 무엇보다 설교에서 회중의 책임을 강조한다. 회중이 설교에서 믿음을 배우고 교훈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것은 불성실의 표적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만일 당신들이 회개를 했다면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 수고하라”고 백스터는 노동자들에게 말했다.

백스터는 이와 같이 회중과 함께 노력하는 설교로 그들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래서 그의 설교가 그들의 삶에까지 깊숙이 들어가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들의 삶과 연결된 세밀한 적용으로 무지했던 키더민스터를 복음의 도가니로 변화시키게 된다.

 

백스터가 말하는 설교자론
백스터는 설교자는 항상 자아성찰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이 태어났던 곳의 교회와 사역지 키더민스터의 목회자들을 통해 그들의 삶이 타인에게 본이 되지 못함을 질타했다. 그들은 늘 술에 찌든 삶을 사는 술주정뱅이들이었다. 그래서 목회자 스스로 자신을 성찰해야 함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는 설교자들이 특히 주의할 점으로 네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구원하시는 은혜의 역사가 목회자의 심령 안에서 먼저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은혜의 역사를 소유했다고 스스로 만족하지 말고 은혜가 생활과 행동에서 유지되도록 하라.
셋째 목회자의 행동과 가르치는 교리가 어긋나지 않도록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넷째, 목회자의 사역을 위해 갖추어야 할 자격에 부족함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는 또 설교자야말로 영혼의 의원이라며, 치유자로서의 설교자의 책무를 강조한다. 백스터는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가 죄인들의 삶에 치유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한다. 복음의 진리는 순종되어야 하므로,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는 건강을 주는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는 실천적인 방법일 때 가장 잘 학습되므로, 순종된 진리는 낫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오랜 세월동안 병과 함께 했다. 따라서 끊임없이 죽음과 직면함으로 말미암아 설교자는 영혼의 치유자로, 건강을 주는 치유자로 묘사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백스터는 설교자야말로 ‘양심을 향한 해설자’임을 항상 잊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는 성경 자체에서 터득된 청교도 설교학은, 기록된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과 상호관계를 제시함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랑의 언약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이 되는 길이며 일단 이 관계가 현실이 되었을 때 그에 따라 사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즉, 성경이 제시하는 교리를 설명하고 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것이 성경을 해석하는 성경적 방법이라고 믿었다. 성경을 기준으로 교리를 해석하고 삶에 적용을 위한 판단에 있어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스터는 청교도 설교자들이 그렇듯이, 설교자는 철저하게 청중들을 살피는 목양자임을 명심하라고 강조했다. 백스터는 심방을 통한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그들의 필요를 알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노력한 설교자였다. 그는 심방의 유익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거룩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홀로 삶과 죽음의 실체를 직면하는 병든 곳은 성직자에게는 좋은 학교이다. 그리고 삶의 활동 중간에서조차도 당신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신학과정을 수료하지 않은 훌륭한 기독교인들을 만날 것이다.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학교의 부지런한 학자들이다. 그리고 영적 학문에서 깊이 있게 배운 사람들이다. 당신이 그들 가까이 있을 때 하늘을 가까이 느낄 수 있고, 당신의 종교적 확신이 강화됨을 발견할 수 있고, 당신이 다른 사람의 선생이 되는 것보다 더욱 당신을 풍요롭게 하는 내적인 진리를 배우게 한다”(Huge Martin, Puritanism and Richard Baxter, 185-8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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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라면 누구나 리차드 백스터의 <참된 목사>(The Reformed Pastor)를 접해보았을 정도로, 그의 책 내용은 탁월하다. 이 책을 두고, 몇몇 목회자들은 1년에 서너 번씩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필립 도드라지(Philip Doddridge)는 이 책의 값어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책의 금언과 방법들이 최선을 다해 추구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목회의 열정을 품도록 목사의 정신을 깨우지 못할 것이다. 이 같은 목사의 열정이 없이는 많은 선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마땅히 되어야 할 성도들의 자리에 미치지 못하게 될 뿐이다.” 그만큼 <참된 목사>는 실천신학 분야에서 역사상 최고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발간 당시부터 찬사를 받았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 목사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다시『참된 목자』를 읽고자 소망하였다. 목사들이 신도를 이끌어 나가는 데 필요한 지침서가 되는 그 책을, 나는 집이 불탔을 때 읽어버렸다. 그는 기이한 힘과 불을 지닌 인물이다.”


요한 웨슬리도 감리교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순회하는 모든 설교자들은 집집이 방문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쳐야만 한다. 그렇다면 백스터가 제시하는 이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만일, 더 이상의 방법이 없다면 지체 말고 그 방법을 채택하기로 하자.<참된 목자>는 정독할 만한 가치를 지닌 책이다.” 그 이후 <참된 목자>는 고전으로서 그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스펄전 역시 <참된 목사>를 격찬했다. 그는 주일설교를 끝낸 저녁에 아내로 하여금 이 책을 자주 읽어달라고 요청했다. 감리교, 독립교회, 침례교 그리고 영국 국교도 또한 이 책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참된 목자>는 오늘날의 목사들에게도 적잖은 통찰력을 제공해 주고 있다.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J. I. 패커(James I. Packer)는 이 책을 통해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할 것을 요구한다.


첫째, 나는 백스터가 믿은 복음을 믿는가? 둘째, 그렇다면 회심의 절대적인 필요성에 대해 백스터와 견해를 같이 하는가? 셋째, 내 삶과 나의 임무를 구체화시키는 이런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인가? 넷째, 나는 내가 바라는 목적과 그것을 추구하는 수단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이성적인가? 백스터가 하고자 노력했던 대로 나는 나의 신도들과 정기적으로 그들의 영적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는가?


 


삶과 연결된 설교
설교자 리차드 백스터를 통해 우리 시대의 설교자들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그의 삶과 성직자다운 고귀함은 목회의 모델로 삼을 수 있다. 그의 삶을 통해 지금까지 수많은 목회자들에게 귀감이 된 백스터는, 한 마디로 ‘자신의 심령에 설교’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성도들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백스터는 성경에 중심을 두고, 성령을 의지하며, 자신이 한 설교를 그대로 실행하면서 자신을 살폈다. 그리고 성경에 비추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양심의 소리에 의한 기독교인의 윤리강령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윤리강령을 삶을 통해 실천했고, 때로는 그대로 행하지 못함을 고민하기도 했다.


백스터는 설교자의 삶이 설교보다 더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언행일치의 설교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려면 말이 아닌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백스터는 일생 동안 무엇을 바라고 설교하지 않았다. 자신은 설교하면서 은화 한 닢 받은 것도 기억에 없다고 말한다. 단지 설교자로서 교회에서 설교를 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왜? 돈은 영혼의 좋은 것을 신실하게 추구거나 혹은 그것을 쫒지 않을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돈을 위해 설교하는 것을 거절했다(Hugh Martin, Puritanism and Richard Baxter, 183-184).


 


비회심자에 대한 강력한 열정
그 당시 청교도에게 흐르는 정신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곧 창조주의 자신에 대한 기록된 증거로 보았다. 그러므로 성경은 눈의 빛이며 영혼의 음식이었다. 설교자의 직무는 성경의 내용으로 회중을 먹이는 것으로, 설교를 통해 생명의 떡으로서 사람들을 먹이는 일이라는 직무가 강조되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성경은 그들에게 선악 간 교회의 진보나 전통,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오직 성경에 의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다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기록과 사람의 마음속에 계시는 성령에 대한 현대적 증거들은 청교도주의의 두 가지 초점이다. 이 두 가지 균형을 가지고 지킨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의 큰 부분이며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백스터는 이처럼 성경의 우위와 성령의 조화를 생명처럼 여기고 설교했다.


동시에 그는 회심하지 않은 자에 대한 강력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설교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따라서 설교에서 자세히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심방을 통한 교육으로 기독교 진리를 가르쳤다. 이처럼 그는 비회심자에 대한 강력한 책임감으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백스터의 삶의 목적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는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술 취한 사람과 무지한 사람들을 향한 그의 열정은 적극적인 방법으로 표출되었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행하기를 권하고 그렇게 행하지 않는 교인들을 책망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복음을 지나치게 값싸게 다루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우리 시대에 적용할 리차드 백스터의 장점들
리차드 백스터의 가장 위대한 힘은 목회 철학과 설교적 상상력과 적용의 기술에 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이러한 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후대인들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첫째, 백스터는 철저한 소명의식을 가진 하나님을 위한 목회자였다. 그는 목회자로 부르신 이는 하나님이심을 늘 인정했다. 따라서 직업으로서 하는 업무는 단 한 시간도 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도 목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직임을 깨닫고 개인적인 영리나 명예를 위한 목회자가 되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것에 맡게 실행한 사람이었다.


둘째, 백스터는 목회자로서 ‘자아 성찰’을 강조했다. 그는 어렸을 때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고 자랐다. 또한, 초기 키더민스터 교회 목회자의 모습 속에서 부패한 실상을 보고, 철저히 자아 성찰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도들은 지옥에 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면서, 정작 목회자 자신은 지옥에 있을 수 있으므로 철저한 ‘자아 성찰’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셋째, 백스터는 뛰어난 목회자다. 복음 전도자로서, 분명 그는 성공한 목회자다. 그의 성공한 목회의 방법은 첫째도 가르침, 둘째도 가르침, 셋째도 가르침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때때로 대중설교로, 때로는 개인 접촉을 통해 청중들을 이해하는 삶을 살았다. 심방과 상담을 통한 교리 교육은 신학과 삶에서 무지한 키더민스터를 변화시켜, 800여 가정이 변화되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했다.


넷째, 백스터는 뛰어난 설교자다. 그는 건강이 좋지 못해 일평생 몸이 약하고 수척했다. 그러나 그는 한 영혼을 잡을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천부적으로 감동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사랑하는 마음이 애처로운 간청의 음악으로 옮기게 하는 목소리였다. 지식의 부요함을 내세우지 않는 평범한 설교와 뛰어난 적용이 그를 능력 있는 설교자로 서게 했다.


다섯째, 백스터는 미래 지향적인 목회자였다. 그는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개혁시킬 수 있음을 믿었다. 교회는 목사의 열심과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열악한 건강 상태와 그 당시 가장 열악하다고 볼 수 있는 키더민스터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다. 그리고 이 비전을 갖고 최고의 헌신과 노력을 다했다. 마침내 백스터는 자신의 꿈을 그곳에서 실현시켰다.


여섯째, 백스터는 언행의 일치를 추구했다. 그는 자신이 먼저 실행해 보고, 성도들에게 행하기를 요구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고 행동이 함께하는 삶으로서의 목회자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일곱째, 백스터는 가정 중심적인 신앙을 지도했다. 그는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각각의 가정을 1시간 간격으로 방문해, 가족 중심적인 신앙 교육을 시행했다. 되도록이면 다른 가족을 배제하고, 가족만의 연합을 중요시 여겼다.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앙의 기초가 가정에서 이루어짐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덟째, 백스터는 뛰어난 저술이다. 그의 책은 놀라운 흡입력이 있으며, 솔직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말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수세기를 넘은 지금까지도 목회자들의 필독서가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백스터는 사랑의 목회자로서, 권징의 강조와 시행을 강조했다. 그는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겸손과 기도로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를 징계했다. 그는 교회 내의 인간적인 불편함 때문에 ‘권짱을 실행하지 않으면 성도들은 삶의 기준을 잃어버린다고 여겼다. 따라서 절차를 밟아 권징을 사용했다. 그는 모든 목회자가 자신처럼 권징할 것을 강조한다. 권징하지 않는 목회자는 태만한 목회자로서, 심지어 교회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칭의 교리의 왜곡
리차드 백스터는 이처럼 탁월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몇 가지 약점은 있다.
첫째는, 새 율법주의다. 백스터는 칭의 교리를 왜곡했다. 그는 이 교리에 있어서, 개혁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그리고 로마 가톨릭 사이에서의 절충을 궁리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그 당시 정치사상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편적 구속, 즉 형벌적이며 대리적이지만 완전한 대속이 아닌 행동으로 설명했다. 그 핵심 내용은, 주님의 이런 행동 덕택에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와 사면을 주는 새 법을 만드셨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법에 대한 순종인 회개와 믿음이 신자를 개인적으로 구원하는 의(義)라고 말했다.


백스터의 이런 견해는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이 당시의 정치사상과 일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통치자이며, 성경은 그의 법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구원이 이중적인 의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새 율법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의와 참된 믿음과 회개에 의해 새 율법을 순종하는 의이다. 믿음은 곧 하나님의 새 율법인 복음에 대한 실제적 순종이기 때문에 의에 의해 전가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최초의 법전인 도덕률의 수행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비록 새 율법에 의해 의로우나, 옛 율법에 관련된 결점들 때문에 매순간 용서를 필요로 한다. 옛 율법의 지시적이고 형법적인 요구들을 만족시킴으로써 새 율법을 제정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신자를 용서하기 위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정부의 우두머리로 생각한 것이다.


백스터는 예수님을 하나님 정부의 우두머리로 보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간이 죄를 사면 받는 필수조건으로 보았다. 이러한 정치적 관념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보다는 심판자와 흡사하게 보이게 한다. 백스터의 핵심인 새로운 법인 새 율법주의는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근거인 그리스도의 대표적 지위의 불일치이며, 그 체계는 인위적이고 영적으로 비현실적이다.


 


보편적 교회론의 오류
리차드 백스터는 그리스도의 몸인 보편적 교회는 단지 하나이며,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보편적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로 보았다. 이는 결국, 유대교나 로마 가톨릭도 교회의 지체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가톨릭이 개신교와 신앙을 차별하려는 것에 대해 단순하게 논쟁을 통한 괴팍함으로 해석했다. 그는 주의 기도와 십계명, 세례, 성찬을 행하는 자들 모두를 한 지체로 보았다. 나아가 유대 교회, 가톨릭, 소시누스파(Socinians)들을 교회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백스터의 수용 태도와 포괄적인 관점은 복음적 관점에서 거부되어야 한다. 백스터가 억지로 성경을 연역적 형틀에 맞추는 정치적인 합리주의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열매의 토대가 되었다. 그가 말한 죄에 대한 사상은 교훈주의(Moralism)로,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로,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는 율법주의로(Legalism)의 씨앗이 되었다. 이 열매는 스코틀랜드에서 새 율법주의가 되었고, 영국에서는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가 되는 쓰라린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백스터가 그렇게 열정을 쏟았던 키더민스터 교회가 오늘날 유니테리언 교회가 되었다는 것은 슬프게도 일치하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리차드 백스터 연구가인 제임스 패커는 그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백스터는 큰 인물이며 성자 같은 사람이다. 목사, 전도자 그리고 저술가로서 그를 아무리 높여도 부족하다. 그러나 신학자로서는 불운했으며 그의 사상은 재앙을 가져왔다. 그는 이것저것을 마구 섞어 놓았다. 이러한 신학 때문에 다음 세대에 교리적 혼란을 유발했다(J. I. Packer,『청교도 사상』, 178에서).


 


우리 시대의 백스터를 꿈꾸며
리차드 백스터는 설교에 관한 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는 청교도 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설교학 이론에 부합하는 설교자였다.


그는 설교할 때 청중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수사학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사용했고, 회중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대화체 설교를 도입했다. 백스터는 효과적인 설교 전달을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설교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설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발음과 억양에 주의했다. 그는 설교의 초점을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데 두었다. 죄에 대해 심각하게 경고했고, 엄숙하고 진지하게 회개를 종용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언제나 주의를 기울였고 말씀을 삶에 실천함으로써 화답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10:17)는 말씀을 상기해 볼 때 성도들이 직접 성경을 보는 것 외의 대부분은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억한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 막중한 책무가 주어지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백스터는 하나님 말씀을 그의 삶 속에서 용해시켜 전했다. 이로써 청중들은 그의 삶과 언어가 일치된 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왔다. 이처럼, 우리 시대의 설교자들도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고, 여전히 교회에 적잖게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교회는 희망이 남아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과 젊은이들이 있고, 풍부한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도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거룩한 성령을 지필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이 땅의 설교자들이다. 우리 시대의 설교자는,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예비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리차드 백스터와 같은 열정을 품고 이 땅을 가슴에 안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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