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육

 

     이 경직 교수 (천안대, 기독교 철학)

 

     I

기독교 교육이라는 개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첫째, 기독교를 교육하는 것이라는 뜻이 있으며, 둘째로 기독교 방식으로 교육하는 것이라는 뜻이 있다. 첫째는 교육의 내용을 가리키며, 둘째는 교육의 방법을 뜻한다. 교육의 내용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에 토대를 두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둘째 의미를, 즉 교육의 방법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우선 일반적인 의미에서 바람직한 교육 방법을 제안하고, 이어서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교육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II

어떤 것이 바람직한 교육 방법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여러 가지 대답이 있다. 서당식 교육을 옹호하는 전통적 교육관에 따르면, 교육이란 선생이 자신에게 있는 지식을 학생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관에 따르면, 지식은 완결되어 있고 변치 않는다.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가르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훈장은 사서삼경을 다 외기만 하면 된다. 사서삼경의 참 뜻을 아는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배우는 학동도 사서삼경을 소리내어 읽고 외울 수만 있으면 그만이다. 더 이상 이해하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교육관에 따르면, 가르치는 사람은 그저 강의안을 읽으면서 전달하기만 하면 되고, 학생은 그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일방적인 전달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교육은 하드웨어(Hardware)에 소프트웨어(Software)를 계속 집어넣는 일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탁월한 컴퓨터 도사라도 286 컴퓨터에 펜티움(Pentium) 컴퓨터에서나 작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집어넣을 수는 없다. 교육 수요자의 능력과 수준을 생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한다면,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먼저 눈높이교육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 수요자의 능력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들로 하여금 대답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 둘째 단계로는, 교육 내용을 가능한 한 그들이 소화해낼 수 있는 수준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많은 양의 지식을 전달하기 보다는 적은 양의 지식이라도 충분한 토의와 설명을 통해 완전히 학생의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 머무를 수는 없다. 286 컴퓨터의 성능을 고성능 Pentium IV 컴퓨터로 업그레이드(upgrade)시켜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지식이 귀해서 어쩌다 구한 책을 애지중지하면서 소중하게 필사 보존하던 중세 시대가 아니다. 도리어 한 사람이 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지식과 정보가 넘쳐 나는 시대이다. 이제 얼마만큼의 지식을 쌓느냐가 중요하기 보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지식과 정보를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는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 지식과 정보 자체보다 지식과 정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한 시대이다. 또한 지식과 정보는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자연과학의 경우에 불과 1-20년 전의 지식은 대부분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실정이다. 대학 생활 4년 동안 많은 지식을 쌓았다 하더라도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사회에 진출해서 제대로 사용하기가 어렵다. 대학에서 배웠던 지식은 이미 옛 것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육은 평생 교육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육도 시대에 맞추어 변해야 한다. 대학교육의 초점은 많은 지식을 전달하는데 두기보다,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데 두어야 한다. 처리 속도가 느린 286컴퓨터에 쓸모없게 된 정보를 잔뜩 저장하는 것보다는 많은 정보를 (아직 지니지는 못하더라도) 담을 수 있는 펜티움 IV 컴퓨터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학생은 의존적인 태도를 벗어나 자립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평생 살아가면서 스스로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구체적인 제안을 몇 가지 하고자 한다.

 

1. 우선 책을 정확하게 읽도록 해야 한다.

  구미 선진국에서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러한 훈련을 시킨다. 우리 나라의 대학 입시에 논술이 들어간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교육 현실을 냉정히 들여다 보면, 중고등학교에서 책을 제대로 읽는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글로 된 책을 읽고서 그 내용을 자신의 말로재구성해서 표현해 보라는 요구를 받을 때 제대로 해낼 수 있는 학생이 대학생 가운데서도 아직 그리 많지 않다. 자신의 생각을 어설프게 감상문조로 쓰게 하는 일에 앞서 먼저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 텍스트를 자신의 말로재구성해서 요약해내는 과제를 많이 주어야 한다.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서도 성경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정확하게 읽는 훈련을 받지 못해서이다. 그렇다면 뜻도 모르고 천자문이나 사서삼경을 그저 외기만 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러한 교육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고전을 읽는 기회를 많이 줄 것을 제안한다. 특히 신학부에서는 성경과 기독교 고전을 읽는 훈련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학교 강의 시간이나 채플 시간에 들은 설교를 그대로 적어 교회에서 다음 주 설교로 사용하거나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집을 기웃거리는 신대원생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이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잘 모르는데만 원인이 있는 것 같지 않다. 도리어 그들이 학부에서부터 성경을 정확히 읽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일반 학부의 학생도 마찬가지이다. 졸업 후 어떤 직종에서 일하든지 간에 글을 읽고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외국 기업과 계약서를 작성할 때 글자 하나의 의미까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글을 정확히 읽어내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큰 손실을 입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따라서 천안대학교가 글을 정확히 읽을 줄 아는 사람을 키워낸다면, 우리 학생들은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든지 환영받을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문자 대신 이미지를 중시하는 시대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포스트모던 시대는 또다른 중세라고도 할 수 있다. 극소수의 학자만이 라틴어로 읽고 쓸 수 있었던 중세시대에 신앙 교육은 성당 벽화 등의 이미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미지를 통한 교육은 직접적이고 감성적이어서 효과를 거둘 수 있지만, 이미지를 통해 표현되는 내용도 옳아야만 한다. 글을 읽는 훈련을 시키지 않았던 중세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고,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외침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계시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확하게 읽는 훈련을 시키는 것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올바른 신앙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일이다.

 

2. 학생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질문하고 대답하고 토론하고 발표할 기회를 많이 주기를 제안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치열한 경쟁 사회이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사회이다. 따라서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을 논리정연하고도 설득력있게 전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수학 시험에서 해답이 중요한 만큼 풀이 과정도 중요하듯이, 학생이 내리는 결론도 중요하지만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논리정연한지도 중요하다. 아무리 옳고 좋은 결론이라 하더라도 설득에 실패하면 뜻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학부를 예로 들면, 이러한 훈련을 거친 학생은 장차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출 수 있다.

 

3. 자신의 생각을 글을 통해 일관되게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를 제안한다.

  예를 들어, 신학논문공모전과 같은 행사를 장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작문 수업 등을 통해 글쓰기 기초 훈련을 시켜야 하며, 과제물로서 보고서나 논문을 쓰게 하고 첨삭을 통해 학생이 개선해야 할 점을 알려주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여러 번 되풀이되면서 학생의 쓰는 능력이 개선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한다. 논리적인 말보다는 감성적 직관에 호소하는 것이 더 효과를 거두는 시대이다. 감성에 호소하기만 하면 전달되는 내용에 관계없이 설득이 되는 시대이다. ‘묻지마 투자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감성과 직관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차분하게 앞뒤를 따지지 않는 시대이다. 그러나 묻지마 투자가 가산을 탕진하는 결과를 낳듯이, 감성적 직관에만 호소하는 설득은 맹목적인 인간을 만들어내기 쉽다. 자신이 설득되는 내용이 참인지를 따져 볼 수 없는 사람으로 이 사회가 가득찬다면, 이 사회의 몰락을 그리 멀지 않다. 우리 천안대학교는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이러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을 키워내야 한다. 그래서 감성으로만 흐르는 풍토속에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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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상

 

기독교 교육.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