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자 칼빈(1509-1564)

- 무엇이 칼빈을 여전히 그토록 대중적이게 하는가?



By J. Visscher

trans. by SeokJun Yun



J. Visscher 박사는 브리티쉬 콜럼비아(British Columbia)주 랭글리(Langley)에 있는 캐나다 개혁교회의 동사목사입니다.

이 글은 클라리온 Volume 58, No. 14 (July 3, 2009)에 실렸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2009년 7월 10일은 특별히 축하해야 할 날이다. 그 날에 전 세계의 교회와 개인들이 위대한 프랑스인 개혁자 존 칼빈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아무도 5세기 전에 태어난 사람을 주목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주검과 망각에게로 넘겨주게 된다.

그러나 존 칼빈의 경우에서는 그렇지 않다. 500년의 먼지가 그의 무덤을 덮었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계속해서 역사가들을 흥미롭게 하고(intrigue), 신학자들을 자극케 하며(challenge), 사회학자의 관심을 끌고, 경제학자들을 놀라게 하며, 출판업자들에게는 기쁨을 주는 인물이다. 참으로 최근 10년간은 이 고대의 사람에 대한 대단한 분량의 에세이들, 논문들,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도대체 무엇으로 이 모든 명성과 관심을 설명할 것인가? 무엇이 그를 여전히 이토록 대중적이게 했는가?

이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것은 그에 대해 말할 것이 너무 없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칼빈은 다방면에서 다면적인 개혁자였다. 아래의 몇 가지 내용만 생각해 보도록 하자



성경적 개혁자

칼빈의 삶과 사역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 첫 번째의 것은 그의 어마어마한 다작이다. 그의 주석들은 많고, 성경의 대부분을 다루고 있다. 매우 조심스럽고, 경의를 가지고, 학자적인 방법으로 그는 성경본문과의 상호작용을 한다. 동시에 그의 주석은 성경의 두 주(主) 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대한 인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과정 중에 어떤 이들은 그가 너무 냉랭한 편에서 이 주석들을 썼다거나, 그 글들이 너무 학자적이거나 말만 장황한 것이 아닌지를 비판하는 불평할지도 모른다. 그 글들은 좀 더 적용적이고 실증적인 편이 더 나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랬다면, 칼빈 읽기에 도전한 사람들 중 아무도 그가 성경을 중대하게 다루지 않았다거나 성경이 말해야만 하는 바를 발굴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 극한의 것을 했다고 말하는 데 까지 다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글들을 결코 우리를 빈손으로 돌아가게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항상 어떤 진리가 설명되고 있거나 어떤 가르침이 해설되고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꿈틀거리게 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채우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개혁자

비록 그의 주석에서도 역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의 기독교 강요를 읽어보면 초대 기독교회의 교부들과 교회의 논쟁들, 그리고 과거의 문제들에 대한 수많은 인용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의 목회 경력 매우 초기에 이미 칼빈은 스위스와 그 너머의 지역들에서 벌어진 토론들과 논쟁들에 포함되어졌다. 이 사건들(논쟁들-역자주)을 목도한 많은 사람들과 이후에 그것들을 논평한 사람들을 경악케 한 것은 칼빈의 헬라와 사방 교회들 양쪽 모두의 교부들에 대해 가졌던 방대한 지식이었다. 암브로스, 어거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그는 그들 모두를 인용할 수 있었고 또 자주 그렇게 했다.

이러한 것들이 보여주는 결과는 칼빈의 논증이 결코 얄팍하거나(superficial) 사색적이지(speculative) 않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의 문제들에 교회 역사의 무게를 날라올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했다. 그래서 종종 이런 표현들이 뒤따랐다. “당신이 지금 칼빈과 논쟁하고 있다면 당신은 단지 그와만 논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교회들과 함께 논쟁하고 있는 것이다.”



교리적 개혁자

신앙고백서와 신경들(forms) 뿐 아니라 소논문들(tracts)과 논문들(treatises)을 통해 칼빈은 자신의 교리적 관점을 정리해 나갔다; 그러나 그가 믿고 고백했던 것을 가장 자세하고 광범위하게 다룬 것이 그의 기독교 강요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안에서 칼빈은 매우 조직적이고(systematic), 상세하며(thorough), 정교한(elaborate) 개혁교리의 방어를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다.

동시에 강요는 잠깐을 공들인 작품이 아니라 평생의 노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유익하다. 칼빈은 비교적 젊은 시절에 첫 번째 판을 썼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는 초판의 내용을 유지하면서, 덧붙이고 빼고, 재고하고(revisiting) 교정하는 일을 거의 죽기 직전까지 계속했다. 잘 알려진 칼빈 학자인 포드 루이스 배틀즈(Ford Lewis Battles)가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변천사에 대해 쓴 책을 읽어보는 것은 매혹적인 일이다.



교회 개혁자

칼빈의 방대한 저작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력을 학문적 영역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칼빈이 성경과 교회 역사, 그리고 교부들로부터 배운 것은 교회 속으로 부어졌다. 성경적 설교에 대한 그의 강조는 예배에서의 초점을 미사로부터 말씀에로 옮기우게 했다. 그는 로마교회의 의례들(rituals)과 고안품들(inventions)로부터 탈출하여 성경적 요소들인 말씀, 성례, 기도, 봉헌, 찬송 등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소생시켰다. 그는 사제직을 철폐하고 성경적 직분들인 장로, 목사, 교사, 집사를 회복시켰다. 그는 마틴 루터와 같이 성직자 계급의 구별을 비난하였을 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직분을 진척시켰다.



예전(Liturgical)의 개혁자

칼빈의 교회 개혁 작업에 있어 부가적으로 주의를 끌 만한 한 영역은 예배의 영역 혹은 예전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칼빈이 동료 개혁자요 멘토였던 마르틴 부서(Martin Bucer)에 의해 발전된 예전을 변형시키고 적용했던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시절(1538-1541) 동안이었다. 거기에서 그는 예배의 다음 규례들을 강조했다: 기원(invocation), 기도(prayer), 신앙고백(confession), 사죄선언(absolution), 십계명 찬송(singing of the Ten Commandments), 성경봉독(Scripture reading), 설교(sermon), 시편과 찬송가의 찬송(singing of a psalm or hymn), 강복선언(benediction).

칼빈이 시편이야말로 실제적이고 참된 교회의 찬송책이라고 확신했다는 사실 역시 주목되어야만 한다. 이로 인해 그는 시편의 사용을 왕성하게 증진시켰으며, 제네바 교회와 종교개혁을 구약과 신약 성경, 그리고 사도 시대의 교회들과의 연속선상에 놓게 되기를 원했다. 1539년에 칼빈은 18편의 시편을 포함하는 책을 편찬했다. 이 시편들은 클레멘트 마롯(Clement Marot)에 의해 프랑스어로 작시되었고, 악보로 만들어졌다. 이후 마롯은 제네바에 와서 루이스 보져스(Louis Bourgeois)와 함께 더 많은 시편들과 찬송가들을 덧붙이게 되었다. 그 사이 칼빈은 그 진행과정을 지도했으며, 시편의 제네바판에 자신이 작곡한 몇몇 찬송가들을 덧붙이기도 했다.



논쟁적 개혁자

그의 목회사역 동안 칼빈은 모든 비난들과 비방자들에 대항하여 개혁 신앙을 방어하는데 있어 결코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자콥 사돌레토 경(Cardinal Jacopo Sadeleto)이 제네바 시민들에게 로마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썼을 때, 펜을 들어 저 유명한 “사돌레토에 답하여(Reply to Sadoleto)”를 쓴 것은 다름아닌 칼빈이었다. 수많은 재세례파 급진주의자들이 영혼수면설을 옹호했을 때, 사이코파니키아(Psychopannychia)라고 불리는 논문을 써서 그들의 관점을 공격한 것 역시 칼빈이었다. 개신교 진영 목사였던 피에르 카롤리(Pierre Caroli)가 그를 아르미니안이라고 고소했을 때에 칼빈은 자신의 삼위일체 안에서의 믿음을 방어했다. 또한 제롬 볼섹(Jerome Bolsec), 요아킴 베스트팔(Joachim Westphal), 세바스챤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등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를 공격하는 일을 계속했다. 칼빈의 펜은 거의 한가할 때가 없었고, 그의 삶은 거의 논쟁이 없던 적이 없었다.



온화한(Gentle) 개혁자

칼빈을 “온화한 개혁자”라고 부름으로써 나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인식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정립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요점이다. 사람들이 칼빈에 대해 가진 보편적인 인상은 무엇인가? 확실히 그것은 냉랭함, 무자비함, 광신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칼빈의 그림이나 초상화들 중 몇몇이 여기에 공헌하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림들 중 어떠한 것도 그를 친근하고 접근하기 쉬운 인물로 정확히 그려지거나 묘사되지 않았다. 눈, 입, 그가 입은 옷, 모든 것이 그를 매우 위협적인 인물로 만들고 있다.

게다가 적어도 그가 젊었을 때 칼빈이 성격이 급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고, 이는 종종 전면에 부각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신앙을 방어하고 비판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쓴 그의 글을 읽는다 했을 때, 그 언어는 강경하고 퉁명스럽고, 거의 공격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논쟁에 있어서의 부드러운 자세는 칼빈의 시대에는 그에게도 그의 논적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는 다른 면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많이 알려지지 않는 면이다. 리차드 스타우퍼(Richard Stauffer)의 잘 알려지지 않은 책 『The Humanness of John Calvin』에서 이 사실은 그려지고 증언되고 있다. 그 책에서 그는 칼빈의 편지로부터의 직접적인 인용을 통해 그가 사랑이 많은 남편이었고, 친절한 아버지였으며, 신실한 친구였고, 감성적인 목회자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간단히 말해 그에게는 자상한 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개혁자

한 잘 알려지지 않은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기 위해 칼빈이 정치적인 면에서도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점 역시 말해져야 하겠다. 물론 이 말은 칼빈이 특별히 정치 분야에 관한 책을 썼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가 정치적인 영역에 대해 말하는 데 있어서도 적실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 중 다수가 뿌리를 잘 내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칼빈은 교회와 정부(state)간의 관계라는 민감한 사항에 대해 논의할 때에도 이를 꽤 명확하게 정의한다. 교회와 정부는 활동과 영향력에 있어서 두 다르고 분리된 영역을 담당한다는 점이다. 그는 이 점을 특별히 제네바에서의 자신의 정치 의회와의 기나긴 투쟁의 경험과 연관시킨다. 칼빈은 시종일관, 그리고 성실하게 교회 치리의 영역이 정부의 사법권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논의했으며, 다양한 의회의 구성원들은 교회에 주어진 신자의 전체 영적인 유익을 돌보는 일로부터 떠나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인상 깊은 정치적 문제 또한 칼빈의 주의를 끌었으며, 그것은 폭군에 순종할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정치적인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순종해야만 한다고 말하지만, 논쟁의 상황에서는 사람에게보다 하나님께 더 순종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마지막 설명에서 사악한 통치자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시민 저항이나 불복종의 문제에 관하여 칼빈은 시민들을 보호하는 것은 하위 관리들의 직무이며, 마약 저항이 필요한 상황까지 진전되었을 때면 시민들을 이끄는 것은 그들에게 달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적 개혁자

칼빈이 정치에 관한 독립된 논문을 쓰지 않았던 것과 같이, 또한 사회나 경제 문제에 대하여서도 결코 독립된 논문을 쓴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석들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여기에서 다시 칼빈은 돈, 가난, 부의 재분배, 금리, 실업, 주(州) 지원 산업(state sponsored industries), 자본, 급료, 무역 등과 관련된 수많은 타당한 해설들을 병행하는 영향력있는 지시들을 제공하고 있다.

칼빈과 관련하여 이러한 영역들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안드레아 비엘러(Andre Bieler)가 쓴 독창적인 작품, 『Calvin's Economic and Social Thought (Geneva, 2005)』에 조언을 구해야만 할 것이다. 이 책은 당신에게 칼빈의 사회적, 경제적 식견에 대한 멋지고도 놀라운 시각을 제공해 줄 것이다.



교육적 개혁자

1559년 6월에 칼빈은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베른 시로부터 쫓겨난 많은 교수와 설교자들을 거기에 임명했다. 이 교수들 가운데 총장이 되고 후에 칼빈의 후계자가 된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s)가 있다. 시간은 흘러갔고, 1564년에는 건물이 들어섰으며 이 건물은 지금도 제네바에 제네바 대학의 한 부분으로 여전히 서있다.

이 아카데미는 두 분리된 분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첫 번째 부분은 더 보편적인 학문들에 대한 교육을 제공했고, 다른 부분은 신학교육에 특화된 것이었다. 후자에 속한 대다수의 학생들은 외국인들이었으며 하나님에 의해 오랜 기간동안 다른 나라들에 칼빈의 가르침을 펼치는데 크게 사용되었다. 이후 이 아카데미는 종합대학(University)으로 발전했지만, 초창기 때의 전 유럽에 걸쳐 칼빈주의적 종교개혁을 진전시킬 수 있었던 그 영향력이란 매우 가치로운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위의 내용들이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것은 칼빈이 하나님께 막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지난 5백년을 지내오면서 많은 다른 영역에서의 그의 가르침은 우리의 삶과, 또한 서구 세계의 양식 모두를 구체화하고(shaped) 정형화했다(moulded). 우리는 하나님께 그로 인하여 감사할 충분한 이유를 가졌으며, 급속도로 세속화되고 있는 우리의 사회 속에서 믿음을 향한 그의 이 헌신이 잊혀지지 않을 것임을 소망하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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