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의 논리적 정당성

 

기독교 예정론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論理的) 정당성은 무엇인가? 과연 기독교 예정론이 논리적으로 정당한 진리인가? 하는 의문은 기독교 예정론에 관심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가 가지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예정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예정의 주된 대상은 인간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절대자이시고 무한자존자(無限自存者)이신 반면에, 인간은 피조물이며 상대자이고 유한의존자(有限依存者)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의한 논리로 기독교 예정론의 정당성을 입증(立證)해 보기로 한다.

 

1.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영원자존(永遠自存)하신 하나님은 창조의 주인으로서 피조물인 모든 만물을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계획대로 창조하시고 섭리해 나가신다. 하나님은 태초 이후 일어날 모든 일들을 창조주의 주권으로 계획하셔서 자연적, 정신적 전 피조계에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를 행사하시는데, 창세 전에 창조주 자신이 미리 정하신 계획대로 하신다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자연스러운 논리의 성립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학의 방법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실유(實有)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논의로 진행하려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작정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을 매우 정당한 신학적 방법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일이나 섭리하시는 일이 모두가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계획하신 것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이루어져 가기 때문이다. 지식인이라면 누구나가 인간 자신이 어떤 주권자의 간섭과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출생일, 용모, 성별, 성씨(가문), 국적, 종족, 직업, 사망일 등의 중요한 사건들은 물론, 그렇지 아니한 작은 일들까지라도 인간 자신의 의지적 결정에 따라 되어진다고 단언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기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총괄(總括)하시는 영역 아래 속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부인할 자 역시 없는 것이다.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결정에 의하여 무슨 일이나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없겠지만 설령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자는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있다고 착각(錯覺)하는 자요, 자신에게 불가능은 없다고 착각할 수 있는 자요, 따라서 온 우주를 자신의 계획대로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자일 것이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가난을 싫어하면서도 가난하고, 질병을 싫어하면서도 병에 시달리고, 전쟁을 싫어하면서도 전쟁에 혈안(血眼)이 되고, 죽음을 싫어하면서도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줄 알면서도 미워하게 되고 사랑해서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사랑하게 된다. 즉 미워지니까 미워하고 사랑해지니까 사랑하는 것이지, 미워하니까 미워지거나 사랑하니까 사랑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이같은 사실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은 주인이 아니라 피조물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주요, 우주의 운행자시며, 역사의 주관자시요,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자()이심을 확증해 주는 또 하나의 증거인 것이다. 지음을 받은 자는 지으신 자의 모든 계획에 따라 만들어지고 움직여진다는 논리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장차 나타날 구원과 멸망에 대한 대상이 어찌 예정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작가가 작품을 만들려고 할 때, 만들기 전 먼저 그 종류와 크기 또는 성질 등을 정하지 않고 작업에 착수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도와는 전연 관계없는 작품을 만드는 자도 역시 없을 것이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할 자와 버릴 자를 미리 정하셨다는 논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자명(自明)한 논리인 것이다.

 

2. 절대자와 상대자의 관계

 

절대자는 하나님이시며, 상대자는 인간이다. 하나님과 인간 관계가 절대자와 상대자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요, 능동자(能動者)와 피동자(被動者)의 관계이다. 즉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주관자요, 지배자요, 자결권(自決權)을 가진자요, 상대자인 인간은 따르는 자요, 지배를 받는 자요, 아무런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자이다. 특히 절대자라는 관념에서 볼때 하나님은 그 무엇의 도움이나 간섭이나 장해(障害)를 받으시는 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은 하나님의 지배와 장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피조물로부터 도움이나 간섭 또는 사단권세의 방해를 받으시는 것으로 인식한다면 하나님의 절대권에 대한 무식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상대자인 인간들이 하나님의 예정 섭리에 대하여 논란을 일으키고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절대권에 대한 무모(無謀)한 도전이 되는 것이다. 상대자(相對者)라는 개념이 평등한 대상 또는 주위 환경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로부터의 견제를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절대자(絶對者)라는 개념은 평등한 대상이 존재할 수도 없고 그 무엇에게도 견제를 받지 않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자인 우리 인간이 절대자인 하나님의 예정의 대상이라는 논리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절대자가 절대권을 가지고, 상대자인 인간을 구원할 자와 버릴 자로 상대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이 그 얼마나 이치에 합당한 말인가?


절대자(絶對者)’라는 용어는 본래 철학에서 모든 존재의 구경적 근기(究竟的根基)를 가리켜 사용되어 온 말이지만, 신학에서도 하나님을 절대적 실유(絶對的實有)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화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에서 말하는 절대자와 신학에서 말하는 절대자는 용어에 있어서가 아닌 개념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철학에 있어서의 절대자 개념은 학자마다 그 의견을 각각 달리하고 있으나, 신학에 있어서의 기독교적 절대자 개념은 너무도 분명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피조된 우주 만물의 제일 원인 혹은 모든 실재(實在)의 궁극적인 근본 기초 또는 스스로 존재하는 실유(實有)라는 것인데, 이와 같은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존재에서든지 존재의 어느 양상에서든지 또는 어느 피조물에게나 제약(制約)을 받으심 없이 절대자의 절대권에 의한 자결정(自決定)으로, 피조계인 상대적 존재를 설계하시고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운행하시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라 오는 상대자(相對者)’ 개념 역시 기독교가 말하는 상대자 개념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 이 논리의 이해를 촉진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절대자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상대자란 제일 원인에 의한 결과또는 자존자에 의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즉 상대자란 절대자에게는 물론 상대자 자신과 피조물 중 상대적 존재를 비롯해서 모든 피조물과 환경 및 상태 등에 대하여 제약을 받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대적 존재인 인간이 절대적 존재자이신 하나님의 자결정적 예정 섭리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은 매우 합리적(合理的)인 논리인 것이다.

 

3. 무한자존자와 유한의존자의 관계 


하나님은 무한자존자(無限自存者)이시며, 이에 반하여 피조 인간은 유한의존자(有限依存者)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의 무한성(無限性)이란 시공(時空)에 있어서나 양식(樣式)에 있어서나 속성(屬性)들에 있어서 그 어떠한 것들에 의해서도 아무런 제한을 받으심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의 유한성(有限性)이란, 시공이나 양식이나 속성이나 또는 그 어떠한 것들에 의하여 제한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예정(豫定)’이라는 시간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깊은 사고와 판단이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무한자존자이신 하나님의 사역의 성질을 유한존재자인 인간이 이해하는데 있어서, 무한성을 유한적 차원에서 잘못 사고할 때, 즉 영원성을 지닌 하나님의 예정 섭리를 시간적 차원에서 고찰하고 만다면 엄청난 차질이 생긴다는 것은 너무도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자연히 문제가 되는 것은 영원(永遠)’시간(時間)’이라는 개념에 대한 문제이다. 일반적으로는 영원이라는 것을 시간이 무한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학문 세계에 있어서는 영원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달리하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 첫째가 하나님의 비시간성(非時間性, Timelessness), 즉 영원의 비시간성에 대한 견해이다. 오래전부터 기독교 신학계에 취급되어 오고 있는 사상으로 영원의 비시간성이란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에 그에게는 시간적인 과거나 미래 또는 현재의 구별이 없고 전후도 존재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둘째는 그와 반대로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과거나 현재, 미래의 시간적 구별이 있다는 견해이다. 이상과 같은 두 가지 견해의 경우들은 모두가 커다란 모순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꼬리를 물고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영원시간이 상대적으로 양립이 된다면 일원론(一元論, monism)이 아닌 이원론(二元論, dualism)에 기초한 견해가 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영원시간은 상대적으로 양립되는 것이 아니고 절대적(絶對的) 관계(關係)에서 포용(包容)이 되는 것이다. 즉 일원론적 결과를 가져오는 견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성에 대한 개념을 단순한 비시간성(Timelessness)’이라고 정립한다는 것은 일부분적인 견해에 불과한 것으로써 이원론적 사고의 모순을 일으키는 커다란 과오를 범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성의 개념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비시간성이라는 시간 개념으로 이해를 얻어보려는 노력보다는 영원성이라는 그 자체의 개념으로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개념이 성립되는데 있어서는 상대 또는 반대의 대상에 대한 개념이 정립될 때 가능해지는 것인데, ‘영원성에 있어서 상대 또는 이에 반대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입장에서 그 정확한 개념을 정립하여 표현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이라는 것이 마치 영원과 상대적 또는 반대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시간영원과의 관계는 절대적, 또는 포용적 관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개념의 상대적 또는 반대적 개념은 순간(瞬間, moment)’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서 구태여 영원성에 대한 정의를 강요 받는다면영원성(永遠性)이란, 초월성(超越性)과 내재성(內在性)이 포용된 무한성(無限性)이 시간과 공간과 형상과의 관계에서 고찰될 때 나타나는 관념(觀念)이다.라고 할 수 있겠다. 영원성은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하면서도 시간과 공간과 형상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무한성의 한 표현이라 하겠다.


이러한 영원성을 지니신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과 형상 안에 유한존재자로 지음 받은 인간을 예정하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진리인 것이다. 도리어 예정이라는 시간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을 논란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 자체가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 대한 모독(冒瀆)이 아니겠는가?


이상에서 기독교 예정론에 대한 논리적인 정당성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르는 여러 가지 반론이나 이의를 모르는게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제3장에서 취급하기로 한다.

 

출처: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