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예수님 (1)

- 요한복음 19:18-30 -

샬롬선교회 


+ 마태복음 27:35-44, 마가복음 15: 24-32, 누가복음 23:33-43, 요한복음 19:18-30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말씀하신 일곱 말씀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리고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마음에 새기고 싶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왜 죽어야만 했는지, 하나님 편에서 바라본 사정을 알 수 있다.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이 말씀은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첫 번째 말씀이다. 이 말씀만큼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특히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 일어난 사건들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백성들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배신당했을 때 분노와 증오로 표출되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체포된 시점부터 나약하고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예수님을 배신했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 로마 총독 빌라도 역시 예수님에게 죄를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협박에 못 이겨 자기 보전을 위해 정의를 굽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이런 마음은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 바로 인간의 죄로 인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빛이신 예수님의 존재로 인해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의 추악한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존재가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묻어버리려고 하는 데서 인간의 죄가 여실히 드러난다.

 

예수의 침묵에 대해 온갖 악의 화살이 무수히 쏟아졌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도 여전히 "너는 남을 구원했으니 너 자신을 구원해 보라"고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나 거기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자비는 최대로 드러난다. 그것이 예수님의 첫마디이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용서'의 소망은 자신이 그 모든 죄를 짊어지고 그들의 저주를 모두 짊어지겠다는 뜻이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떤 부끄러움도, 어떤 주저함도, 어떤 비난도 받지 않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자로 삼으셨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싶다. 이분 외에는 구원(용서)이 없기 때문이다. 용서받은 자에 합당한 행보를 해 나가기를 소망한다.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복음 23:43)

 

골고다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 명의 범죄자가 마태와 마가는 '강도', 누가는 '범죄자', 요한은 특정하지 않고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신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반응은 달랐다. 그 반응이 그들의 인생을 크게 갈라놓게 된다. 한 사람은 예수님께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냐.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고 욕을 했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은 "우리는 우리가 한 일의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분은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소서"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보응을 받고 있음을 자백한 것이다. 그리고 저주와 조롱이 쏟아지는 가운데 죽어가는 예수님에게 "나를 기억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는 증거다. 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빠르고 확실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구원의 선언인가. 그는 자신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인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발견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극적이고 감동적인 구원이다. 여기서 큰 위로를 본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 '낙원'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누가복음 16:19-31)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품'이다. 그곳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가는 곳이다.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든지 주와 함께 살리라"(데살로니가전서 5:9) 낙원(파라다이스)은 하나님이 정하신 '오늘'이라는 날에 현존하는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

 

'오늘'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의미의 '오늘'이 아니다. 히브리어로는 '핫욤-'(הַיּוֹם)으로 '그 날'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 하나님께서 '표징으로 삼으신 날'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예는 시편 2:7에서도 볼 수 있다. 그 구절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서 "너는 내 아들아,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오늘'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할 아들이 시간 속으로, 혹은 역사 속으로 뛰어든다는 하나님이 정하신 특정한 날을 나타낼 때 '오늘'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영원자로서의 하나님이 하시는 특정한 일이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표현될 때, 그것은 바로 '핫욤-', '그 날', 혹은 '오늘'인 것이다. '오늘'이라는 날에 아들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된 것을 성경은 '낳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2:11의 유명한 성탄절 말씀, "오늘 다윗의 동네(베들레헴)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도 '오늘'은 하나님이 정하신 '핫욤-'(הַיּוֹם)이다. 그리고 '나셨다''낳았다'('-라드' יָלַד)의 완료형 수동태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따라 하나님인 아들을 시간 속으로, 역사 속으로 개입시키신 것이다. 아들은 인간으로서 가장 연약한 위치인 아기로 시작하셨고, 그 생애의 끝에는 인간으로서의 수모와 죽음을 맛보셨다. '맛보다'라는 동사는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로,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로 '맛보았다'는 뜻이다. 아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이다.

 

3.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한복음 19:26, 27)

 

예수님이 처절한 고통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리게 하는 말씀이다. 자신의 어머니의 앞날을 걱정하며 '사랑하는 제자'로 불리는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맡기시는 말씀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에게도 "거기 네 어머니가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회개한 범죄자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듯이, 여기에도 남겨진 어머니를 생각하는 효도의 말씀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지 생각해 볼만한 대목이다.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예수를 통해 예수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로 삼는다는 것은 예수와 형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가 아니라 형제이다. 이 관계의 변화야말로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히브리서 2:10, 11“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는 시편 22:22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은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이야말로 형제의 맏아들이 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의 일원이 되고,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마가복음 3:34, 35에도 예수님은 자기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 어머니,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또 내 어머니니라." - 아버지가 언급되지 않은 것이 중요하다. 본래 가족이라면 아버지가 없는 가족은 건강한 가족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영적인 가족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맏형으로 모시는 형제자매, 그 새로운 관계 속으로 우리는 초대받은 것이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요한은 그 대표이고, 어머니 마리아는 교회의 대표로 생각할 수 있다.

 

빌립 얀시라는 기독교 작가가 있다. 그가 자란 교회는 결점이 많은 교회였다. 그래서 그는 여러 번 교회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려고 했는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애초에 완벽한 배우자, 완벽한 부모, 완벽한 자녀란 존재할 수 있을까. 단점이 있다고 해서 가족을 버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교회를 포기해야 하는 걸까." 그런 여러 가지 갈등 속에서 그는 '교회: 왜 그렇게 중요한가'라는 책을 출간했다.

 

요즘은 특히 상처받을까봐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가상세계(가상현실)에 들어가서 게임 속에서 애완동물을 키우거나 친구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늘날 인터넷으로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시간에,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다. 집에 있으면서 여러 교회 홈페이지에서 설교를 읽을 수 있다. 또 어떤 교회의 예배를 직접 보고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앞으로 사람들이 교회에 더 이상 오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터넷으로 예배를 보고 설교를 들을 수는 있지만, 교회라는 '교제의 삶'을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교회 생활 없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2:41에 나오는 "더하더라"라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http://meigata-bokushin.secret.jp/index.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