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

- 요한복음 11:1-45 -

샬롬선교회 


[요한복음 11:38-44]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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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 '일곱 가지 기적''일곱 가지 표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단순한 초자연적 기적이 아니라, 그 기적의 사건 속에 어떤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기적을 보고(알고) '다행이다,'가 아니라, 그 기적의 이면에 있는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깨달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표적'을 살펴본다.

(1)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축복의 포도주가 떨어졌다.

(2)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들어 죽을 것 같다.

(3) 3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병으로 누워 있다.

(4) 예수의 이야기를 들으러 따라온 오천 명의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다.

(5) 배에 탄 제자들에게 갑작스런 강풍이 불어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다.

(6) 선천적 맹인이 있다.

(7)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다.

 

여기에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 있는데, 이 일곱 가지 표징은 우리 인간이 삶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국면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혼례는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소중한 포도주가 떨어졌다. 질병과 그로 인한 절망, 음식으로 대표되는 생존의 보장, 갑작스런 공포에 대한 방어의 보장, 태어날 때부터 어둠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인생에서 누구나 반드시 직면하게 되는 죽음이라는 문제. 이러한 다양한 현실의 문제에 휘둘리는 우리들.

 

거기에 예수님이라는 분이 개입함으로써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을 살펴보자.

(1)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주셨다.

(2) 병들어 죽을 뻔한 아들이 고침을 받았다.

(3) 38년 동안 병으로 누워있던 사람을 걷게 하셨다.

(4) 군중에게 배불리 먹이셨다.

(5) 거센 바람을 잠잠케 하셨다.

(6) 태어날 때부터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

(7)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

이것들은 표면적인 현실에 불과하다. 요한은 이런 일들을 통해 더 깊고 중요한 것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는 마지막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1. 이 병은 죽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곳에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세 형제가 살고 있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에 대해서는 다른 복음서에도 나오지만, 막내 동생인 나사로의 이름은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예수님은 종종 그들의 집에 머물렀던 것 같다.

아마도 이 세 형제는 부모를 일찍 여읜 것으로 보인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유대 나라에서도 집을 물려받는 것은 남자였기 때문에 동생 나사로에 대한 그녀들의 사랑은 남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단 하나뿐인 동생 나사로가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꽤 심각한 병이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자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빨리 오셔서 동생을 고쳐주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주여, 보소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만 전했다. 그 말만 전하면 예수님이 바로 날아와서 동생 나사로를 고쳐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 이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 소식을 들으셨을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 병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다."라고.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어떤 의미에서 나사로의 병, 그리고 그로 인한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 이 일곱 번째 표적에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는 것 같다.

(1)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해

(2)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신시키기 위해

 

2.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해

 

그 첫 번째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는 첫 번째부터 일곱 번째까지 모든 표적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곱 번째는 '표적'의 총결산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나사로의 병은 낫지 않고 죽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어서 끝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살리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병을 고치시는 것은 이전에도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것처럼, 38년 동안 누워있던 사람을 일으켜 세우신 것처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다. 나사로의 병이 낫지 않고 죽고, 그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자 목적이었던 것 같다.

 

3. 부활의 믿음을 확신시키기 위해

 

또 다른 목적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사실 이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결국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하게 만든다. , 나사로의 부활의 기적이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게 된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죽음에서 부활하는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인간을 죽음 속에 가두어 왔던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고, 죽음의 공포에 묶여 있던 사람들을 거기서 해방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히브리서 2:15에 그 사실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평생 죽음의 공포에 묶여 있던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 이것이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이 병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라는 말씀의 의미인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도 바로 달려가지 않고 이틀이 지나서야 비로소 베다니 마을로 향하신 것이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요단강 동쪽에 계셨던 것 같다.

 

7. 그 후 예수님은 "다시 유대 땅으로 가자"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10장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유대 당국과 격렬하게 논쟁을 벌여 돌에 맞아 죽을 번하였고, 지금 그곳을 떠나 요단강 동편에 잠시 피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몸을 염려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는데, 8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선생님, 방금 전에 유대인들이 당신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또 거기 가시려 하십니까?"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9-10절에서 아무리 원수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낮에 걸어가면 걸려 넘어지지 않듯이 자신에게는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가 있기 때문에 지금은 괜찮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제부터 자신은 나사로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리라'고 하셨다.

'나사로가 잠들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나사로가 이 때 이미 죽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담이지만, 성경에서는 죽는 것을 '잠든다'고 말한다. 언젠가 주님께서 그 잠에서 깨워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참고로 묘비에 '〇〇〇〇〇〇・・・여기에 영면하노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면(永眠)'이라는 것은 무서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기 때문이다. ,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잠에서 깨어나는가 하면,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랑의 관계의 세계로 초대받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는 영원한 심판을 받아 둘째 사망에 처하게 된다. 그것은 영원히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세상이다. 대체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창조된 인간이 영원히 관계를 맺지 못하고 고통받는 세상에 던져진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심판이며, 영원한 '죽음'이다. 그 반대가 영원한 '구원'이다. 예수를 믿는 자는 비록 죽더라도 주님께서 그 죽음의 잠에서 깨워주시고 영원한 사랑의 관계의 세계로 맞이해 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보장이다.

 

25절을 읽어보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너희가 이것을 믿느냐?

 

성경에서 말하는 '믿는다'는 말은 단순한 승인, 동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을 떠올릴 때, 죽음의 의학을 주창한 한 정신과 의사의 다큐멘터리(NHK 방영)가 떠오른다. 柳田邦夫(yanagida kunio)라는 작가가 '죽음의 의학'이라는 책에 쓴 내용이다. 암 선고를 받은 한 정신과 의사의 투병 기록으로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한창 일할 나이, 그 일에 삶의 보람을 느끼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혈뇨가 나온다고 해서 검사를 받았다. 사실 그것이 암의 전조증상이었던 것이다. 이후 검사, 검사의 연속이 이어졌고, 그 검사로 인해 몸은 지쳐갔고, 자신의 삶의 보람인 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 결국 그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담당 의사는 증상이 조금이라도 더 진행되지 않도록 일을 쉬고 안정을 취하라고 권유했지만, 그에게 있어 일은 무엇보다도 삶의 보람이었기 때문에 닥터스톱을 거부하고 지금까지 해오던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던 중 그는 의사로서 현대 의료의 모습에 대해 강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물론 과학이 발전하고 의료기술이 발전해 수명을 하루라도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조바심, 두려움, 그런 마음의 고통에 대해 현대 의료는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죽음의 의학'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증상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암은 온몸으로 전이되었고, 기력이 쇠약해져 침대에 누워만 있게 되었다. 병약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그는 병문안을 오는 동료와 선배 의사들에게 죽음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요구한다. "죽음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내세를 믿습니까?" 등등. 하지만 동료와 선배들은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아무도 진정한 위로를 해주지 못했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그를 위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문서를 보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절망감, 허무감, , 왜라는 허무감에 휩싸여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그 모습이 너무 불쌍했다.

 

우리도 언젠가는 예외 없이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만은 모두가 평등하다. 하지만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죽음의 불안에 대한 진정한 위로, 진정한 승리가 과연 있을까. 인생이 끝날 때 자신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삶, 그런 인생은 매우 비참하다. 그 사람이 인생에서 한 여러 가지 일들은 죽음에 대해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분명히 알고, 어떻게 되는지 알고 나서야 비로소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신다. 지금도 그렇다.

우리의 두려움의 마지막 보루인 '죽음'을 물리치시고 승리를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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