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기도(3)

'모든 신자들을 위한 기도'

- 요한복음 17;21-23 -

 샬롬선교회


[요한복음 17:21-23]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

 

+ 요한복음 17. 예수님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제자들에 의해 믿은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이며,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11). 아버지와 아들이 이음새가 없는 관계로 하나가 된 것처럼 그들도 그렇게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기도는 과연 들으셨을까? "그러하다!"입니다. 제자들은 결국 '하늘로부터 능력을 입혀 주셨을 때' 그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일치된 곳에서 초대교회는 무적의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전반부의 핵심 키워드는 '마음을 같이 하라' 혹은 '마음을 합하라'는 말씀입니다(1:14, 2:1, 2:46, 4:23, 4:32, 5:12). 이 말씀이 기록된 곳에는 반드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큰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하나 된 곳'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 요한복음 20절 이후부터는 제자들에 의해 신자가 된 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데, 그 내용은 그들과 '하나가 되게 하여달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과연 들으셨을까?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니요!"입니다. 이 기도는 아직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도 하늘에서 이 기도를 계속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기도가 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아들 예수님이나 아버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깊은 죄성 때문입니다.

 

1. 시편 113편의 '일치의 비전

 

+ 시편에서 '일치의 축복'이 명령된 구절이 단 한 군데 있습니다. '힌네- - -'(히브리어)로 시작하는 시편 133편입니다.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 여기에 '일치의 축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치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축복을 명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반대로 일치가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는 것도 진리입니다.

+ 초대교회에서 마음이 하나 된 사람들 위에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이 부어져서' 아무리 핍박을 받고, 상처를 입어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분열을 가져오는 작은 벽이 생기는 순간, 교회는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잃게 됩니다. 아들 예수님이 왜 제자들을 위해 "그들을 하나 되게 하여달라"고 기도하셨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성경이 말하는 일치는 다양성의 일치다.

 

+ 성경이 말하는 일치는 유니즌이 아니라 하-모니(조화)의 일치입니다. 다양한 것들이 미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세상입니다. '다양성의 일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이심에서 오는 하-모니(조화)로서의 '일치'입니다.

+ -모니는 다양한 차이와 입장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며 함께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내 기준만 가지고, 내 잣대로만 잰다면 결코 하모니를 만들 수 없습니다. 나와 다른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관용이 없으면 만들 수 없습니다.

+ 일치란 틀에 박힌 과자처럼 모두가 같은 모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옷을 입고,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아버지가 선택하고 아들이 임명한 제자들을 생각해보라. 거기에는 성격도 다르고, 입장도 다른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모두 같았던 점은 '나는 사람보다 더 위대해지고 싶다'는 점입니다. 이 같은 마음이 결국 그들을 갈라놓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기도해야 했습니다.

+ 성경이 지향하는 일치,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이고, 그것은 '모든 다양성을 인정하는' 세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성경을 통해 배워야 하는데, 자연계의 운행 속에도 그것이 게시되어 있습니다.

+ 자연계 속에 계시된 '다양성의 일치'는 자연 속에 있는 미묘한 균형입니다. 강한 것만이 살아남는다면, 그 강한 것만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뱀과 개구리의 관계. 가치 있는 나무만 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숲 자체가 정말 섬세한 미묘한 균형을 이루며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한번 파괴하면 원상복귀를 하는데 수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 수많은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자연계의 미묘한 균형을 깨뜨린다면 결국 재앙이 닥쳐올 것입니다. 이제 인간이 그 장본인입니다. 자신의 가치관으로, 이익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을 더럽히고, 그 균형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인해 전 세계적인 기후변화가 일어나면서 이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원래 일어나지 않아야 할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 과거 일본은 열도개조라는 명목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그곳에 공장과 택지, 골프장을 만들었습니다. 지표에서 불과 30cm 정도 깊이의 땅속에는 지상의 대부분의 생물을 지탱하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미생물과 많은 풀과 꽃의 뿌리와 씨앗, 작은 동물, 그리고 나무의 뿌리도 그곳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곳을 모두 파헤쳐서 조성한다면 그곳에는 예전의 풍요로운 자연을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혹은 그곳을 두꺼운 콘크리트로 덮어 버리면 생물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 그런데 1cm의 흙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가을이 되면 떨어지는 낙엽, 그것을 미생물이 분해합니다. 혹은 벌레나 작은 동물이 죽어서 그것이 분해되어 갑니다.

+ '고작 흙, 하지만 흙'입니다. 그 흙이 생명을 키우는 흙입니다. 그 흙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음새 없는 사랑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3. 영적 일치를 가져오는 바울의 네 가지 제언

 

+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일치를 이루기 위한 네 가지 제언'을 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위의 성경에서 바울이 일치를 유지하고 불일치를 몰아내기 위해 언급한 네 가지 사항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1) 일치를 유지하고, 같은 사랑의 마음을 품고, 마음을 합하고, 뜻을 같이 하라.

+ 참새나 백조와 같은 큰 새가 날 때 V자형으로 편대 비행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그리고 항공 역학적으로도 이치에 맞는다고 합니다. 새가 날 때 날개 끝에서 뒤쪽으로 소용돌이 모양의 난기류가 발생하는데, 난기류의 비스듬히 뒤쪽에는 상향 기류가 있기 때문에 뒤에서 날아가는 새는 상향 기류를 타면 에너지 소모가 적다고 합니다. 그래서 참새와 백조들은 V자형이나 비스듬히 일렬로 이어진 편대 비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리가 함께 모여 장거리 비행을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우리도 개별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함께 일할 때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 또한, 선두로 날아가는 새는 에너지 소모가 크고 피곤하기 때문에 때때로 뒤쪽의 새와 위치를 바꾸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두로 날아가는 새가 반드시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는 '서로의 짐을 서로 지고 가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요?

+ 또한, 한 마리가 병에 걸리거나 상처를 입어 편대에서 떨어져 나가면 다른 두 마리의 새가 부상당한 새와 함께 조금 뒤늦게 날아가 회복될 때까지 돌봐준다고 합니다. 무리에서 떨어진 사람들을 완전히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사랑과 배려, 인내와 관용>이 필요한 것입니다.

 

(2) 무슨 일이든 자기중심이나 허영심에서 벗어나지 말 것.

+ 다른 번역(柳生訳)을 보면 '어떤 일이라도 경쟁의식이나 자기 과시욕으로 해서는 안 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 예전에 어떤 책을 읽고 리포트를 제출하는 과제를 낸 적이 있습니다. 각자 그 책에 쓰여 있는 내용을 정리하고, 자신이 그 책에서 배운 것을 보고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단 한 명만 그 책에 대해 비판적인 리포트를 제출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 그 책에는 이런저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제기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이 그 책을 읽고 거기서 무엇을 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학생의 보고서는 제가 의도한 것과 달랐습니다.

+ 저는 그 보고서를 읽고 어떤 평가를 해야 하는데, A라든가 B라든가 C라든가......... 제가 그에게 준 평가는 C가 아니라 A+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에 대해 제가 의도한 것과는 다른 내용의 보고서였지만, 그가 쓴 내용은 그 책을 잘 읽고 자신의 확고한 생각을 정리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떤 일이든 자기중심이나 허영심으로 상대를 평가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썼더라도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평가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도 그의 보고서에 대해 나름대로 반박하는 댓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평가는 A+를 주었습니다. 인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그는 나를 여전히 좋아해주고 있습니다.

 

(3) 겸손하게, 서로가 서로를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 이 부분은 좀처럼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잣대로만 생각하면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피아노를 치는데, 피아노를 친다는 잣대로만 사람을 비교하면 나보다 뛰어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나보다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일이 생깁니다. 그것은 하나의 잣대로만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 이 바울의 권면은 '겸손하게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는 의미는 이런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가지 잣대로만 판단하지 말라는 것. 게다가 자신의 잣대로.... 세상에는 다양한 잣대가 있습니다. 설령 연주 실력은 못해도 음악에 대한 감수성이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잣대로 잰다면, 나보다 더 뛰어난 마음이나 배려심이 풍부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나와는 다른 면에서 뛰어난 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관계 맺는 것입니다.

+ 결코 한 가지 잣대로만 잴 수 없는 겸손함, 그것은 상대방의 좋은 점을 찾아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에게는 없는 상대의 좋은 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관계를 맺는 것을 이 말씀은 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마음가짐은 다음 네 번째 포인트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4)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돌아봅니다.

+ 인간은 자신에게 여유가 없어지면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집니다. 자기 일에만 몰두하게 되고, 남을 신경 쓸 여유가 없어진다.

+ '바쁘게 하다', '바쁘다''마음을 잃다'라고 씁니다. 바쁘게 살아야만 하는 생활방식을 취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유 있는 삶, 계획적인 준비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급박한 상황을 피하는 것입니다. , 항상 여유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여유를 잃게 하는' 요인으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성과가 보이지 않는 상황-생산성이 보이지 않는 일이나 활동- 속에서 마음의 여유가 사라집니다. 마음의 여유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온다고 저는 믿습니다.

+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충분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리면 다른 사람을 돌아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여유를 잃지 않았는지, 잃었다면 왜 잃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깊은 문제에 대한 이해를 얻게 하고, 그 결과 사람을 배려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이렇게 바울은 일치를 위한 네 가지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며,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5).

............................

 

+ 아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가 되게 하여달라'고 기도하셨다. 이 기도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실현되지 않은 기도와 실현되지 않는 기도는 전혀 다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가장 어렵고, 성령의 도움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치입니다. 그리고 이 일치야말로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목적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먼저 나 자신부터 이 기도가 실현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http://meigata-bokushin.secret.jp/index.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