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기쁨으로

- 요한복음 16:1-24 -

샬롬선교회

 

[요한복음 16:16-17, 20-24]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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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16-24에는 '잠시 후에'라는 단어 '미크로스' μικρος7번 나오는데, 18절에 "그들은 '주께서 잠시 후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가?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라고 되어 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리라. 그러나 또 얼마 후에 너희가 나를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17절에서는 제자들이 "'내가 아버지께로 가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이라고 한 마디 더 덧붙이고 있기 때문에, 원래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1. '조금 있으면'의 의미.

 

예수님의 말씀을 그림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다시 너희가 나를 보리라."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로 가겠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아버지 오른편에 앉으실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깊은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실현될 '천년왕국 시대' 이전에 놓일 '교회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성령이 임한 오순절 이후부터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교회 시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보면, 그야말로 정규 프로그램 속에 '특별 프로그램'이 들어온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실 말씀이 많았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할 힘도, 들을 수 있는 힘도 없었습니다(요한복음 16:12). 그러나 예수님은 곧 일어날 일들을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그것을 이해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말할 때 예수님을 닮고 싶은 부분입니다. 듣는 사람이 아직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진리는 진리로서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바르게 깨닫게 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설득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2. 몇 가지 신경 쓰이는 어휘들

 

여러 성경 번역본을 비교해 보면 그리스어 사전을 찾아보는 것보다 더 흥미롭다. 그리스어 원문은 μικρν καοκέτι θεωρετέ με, καπάλιν μικρν καὶ ὄψεσθέ με.입니다. 이 구절에서 몇 가지 어휘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1) '미크로스' μικρος

 

이 어휘는 '잠시 후에'로 많이 번역되어 있는데, 이때의 상황을 고려하여 ''((バルバロ柳生訳)으로 번역한 것도 있습니다. 16절에 두 번 나오는데, 저는 앞부분을 ''으로 번역하고, 뒷부분을 '잠시 후에'로 번역한 バルバロ柳生訳, 이 때의 상황을 더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 '보다, 지켜보다, 보이다, 만나다, 만날 수 있다'

 

헬라어 원문에는 '보다'라는 단어에 '세오-레오-' θεωρέω'호라오-' όραω(미래형 '오포마이' όφομαι)의 다소 의미가 다른 두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新改訳("얼마 후에 너희는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에 다시 나를 보게 될 것이다.")와 같이 두 단어 모두 '본다'라는 단어로 번역한 것도 있고, 미묘하게 번역어를 바꿔서 번역한 것도 있습니다.

 

세오-레오- θεωρέω 호라오- όραω

보다(新改訳新共同訳岩波訳エマオ), 보이다(柳生訳), 지켜보다(岩波訳永井訳), 만나다(フランシスコバルバロ塚本訳), 만날 수 있다(口語訳), 눈앞에서 보다(永井訳)

 

그런데 잠시 후 너희는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에 다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로 표현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출산의 고통과 기쁨'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3) '내 이름으로'

 

또한 23-24절에는 '내 이름으로' ἐν τῷ ὀνόματί μο를 구하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후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더 이상 내게 아무 것도 묻지 아니하리라"(23). , 제자들의 곁에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계셨기 때문에 특별히 아버지께 구할 것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늘로 돌아가신 후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으로 인해 제자들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3.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예수의 이름'이라는 이름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없던 이름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과 좌정하심으로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으로서의 '예수의 이름'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이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이 '예수의 이름'의 권위와 능력을 진정으로 믿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 끝에 덧붙이면 되는 정도로 여기고 있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23)라는 말씀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8-1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는 좀 더 바르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믿음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의 이름 외에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위대한 이름,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 능력과 영광의 이름,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이름인 '예수의 이름으로'[(ἐν τῷ ὀνόματί ησοῦ ) in the name of Jesus ., 모든 일(예배, 찬양, 선교, 교제, 교육, 목회, 영적 싸움 등)을 행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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