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신 예수님

- 요한복음 14:4-6 -

샬롬선교회

 

[요한복음 14:4-6]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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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14:4)라고 말씀에 도마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14:5)라고 아는 척하지 않고 솔직하게 질문했다. 도마는 ''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토마의 질문을 문으로 삼아 더 깊은 하나님의 비밀로 이끌어 간다.

 

1. 요한복음 14:4은 동의어적 병렬법이다.

 

14:6 말씀을 잘 관찰하면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다. 유대인의 표현 스타일에 잘 통하는 분이다. 시편에서 특히 그렇고, 그 표현의 특징은 병렬법이다. , 병렬법 - 동의적 병렬법, 그 외에 반위형이나 통합적 병렬법도 있다. 여기 14:6'동의어적 병렬법'으로, 전자의 내용을 후자의 내용으로 바꾸어 말하고 있다. 어떻게 바꿔서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곧 길이요'는 후반부에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로 바뀐다. 전반부의 '내가 진리이다'라는 부분이 어떻게 대체되는가 하면, 후반부 전체에서 말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 "누구도(예외 없이) ~할 수 없다."로 대체되고, 더 나아가 전반부의 '내가 곧 생명이다'라는 부분은 후반부에서는 '아버지께로 오라'는 말씀으로 바뀌어 있다.

, 예수님 자신이 '', '진리', '생명'을 설명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진리''생명'의 삼박자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2. 나는 '생명'이다 γώ εμι η ζωή

 

여기서는 명상의 소재로 특히 '생명'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신개역(新改訳)에서는 특히 '생명'으로 표기되어 번역된 단어의 원어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프쉬케- φυχή', 다른 하나는 '-- ζωή'이다. 둘 다 '생명'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프쉬케-'는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몸, 혹은 마음, 영혼을 뜻한다. 반면 '--'는 본래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감으로서의 생명을 의미한다. 그것이 죄로 인해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생명인 '--'ζωη로서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신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요한복음 14:6"내가 곧 생명이다."라는 '생명'에는 '--' ζωη가 사용되고 있다.

 

마태복음 7:14 "생명[ζωή]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ζωή'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특히 '영원한 생명'이라는 경우의 '생명'은 모두 '--' ζωή'가 사용되었다. '영원한 생명''영원''하나님'과 동의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이라는 단어도 앞서 설명했듯이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감으로서의 생명을 의미한다.

참고로 몸으로서의 '생명' φυχή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사용되고 있다.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 생명[φυχή]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또 자기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생명은 음식보다 더 귀하고, 몸은 옷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

마태복음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자기 생명[φυχή]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할 수 있겠느냐."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φυχή]을 버리느니라."

 

3.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로서의 '생명'을 닦는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로서의 '생명' -- ζωη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이다. 그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갈고 닦아야 한다. '생명'이 가진 힘은 무엇인가. 이것을 네 가지 측면에서 말하고자 한다.

 

(1)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힘

 

생명을 닦는 첫 번째 측면은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오히려 세상을 거스르는 힘이다. 가을이 되면 많은 연어들이 몇 년 만에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 산란을 한다. 넓은 바다에서 회유하다가 어떻게 자신이 태어난 강을 알 수 있는지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그 올라가는 힘은 대단하다. 온 힘을 다해 올라간다. 거기서 자손을 이어가려는 자연의 엄청난 힘을 느낄 수 있다. 죽은 물고기의 경우 강물의 흐름에 따라 그냥 떠내려가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는 강물의 흐름을 거슬러 자유롭게 헤엄쳐 올라간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기록했다.

 

전에는 우리가 죽은 물고기처럼 '이 세상 풍조를 좇아 행하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리스도를 만나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흐름을 거슬러' 살 수 있는 힘이 주어졌다.

여기서 말하는 '흐름'이라는 말은 '유행'이라는 뜻이다. 유행은 패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 즉 시대적 사상적 풍조, 감성, 세계 경제의 흐름, 사회의 구조 등도 포함한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포함해 필연적으로 시대의 흐름 속에 놓이게 된다. 그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갈 힘'을 받은 사람은 그런 시대의 흐름, 시대의 풍조, 시대의 유행에 대해 그냥 휩쓸리지 않고, 세속화되지 않고, 그것을 거슬러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다.

 

(2)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는 힘

 

삶을 닦기 위한 두 번째 측면은 첫 번째와 연결되는 것인데, 사물을 항상 긍정적으로 보는 힘이다. 물론 모든 일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긍정적인 면만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한 해에 3만 명이 넘는 자살자가 발생하고 있다. 해마다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특히 최근에는 경제 불황으로 인해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은 중년 남성의 자살이 매우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빼앗는 불행한 일이지만, 이 현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살아갈 힘의 한계를 느끼고 살아갈 힘을 잃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은 긍정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면이 있다. 어떤 사람은 "경험 자체가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은 경험 자체에 대한 태도다"라고 말했다. 어떤 태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 불행한 경험을 받아들이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편의 저자도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119:71)라고 고백하고 있다. '고난'을 만나는 것은 불익 그 자체이다. 하지만 그것이 제게는 유익이었다. 왜냐하면 그 일로 인해 나는 주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저는 주의 말씀을 무엇보다도 기쁨으로 여기고 밤낮으로 그 말씀을 외우게 되었다는 것은 '생명'을 접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 ζωή'라는 '생명'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힘이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다면, 그 힘을 갈고 닦아야 한다.

인생에는 반드시 크고 작은 자신에게 불리한 일들이 일어난다. 자신에게 불편한 일이 일어났을 때 짜증내지 말아야 한다. 짜증내지 않고 객관적으로 자신의 짜증을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이 하나의 힘이다.

 

(3)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는 힘

 

삶을 닦는 세 번째 측면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는 힘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8). '보이지 않는 것'은 마음이나 유령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미래에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의 약속이다. 거기에 주목하며 살라는 의미이다.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의 죽음일 뿐, 영혼은 계속 살아간다. 그 영혼에 대해 앞으로 일어날 일에 주목하며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미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박한 물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잠든 사람들에 관해서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확실히 알기를 원하노라). 이는 너희가 다른 소망 없는 사람들처럼 슬픔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의 휴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때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데살로니가전서 4:17-18)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25)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장차 반드시 일어날 일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분명하게 보여주신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빨리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하늘에 있는 집에 살기를 소망했던 사람이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오히려 생명으로 빛나게 된다. 그런 면에서 '겉사람은 썩어질지라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했다. '속사람'은 생명의 원천, 살아 있는 힘의 원천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 생명을 갈고 닦아야 한다.

 

(4)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안에 머무는 힘

 

마지막 네 번째 측면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 가운데 항상 머물러 있는 힘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 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2~33). 여기서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환난이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평안을 가질 수 있는 힘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은 이 세상에서 '평강 가운데 우리가 머물 수 있는 힘이다. 그러나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르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상황(지위나 재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평안이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우리 아버지가 함께 하시는 임재에서 오는 평안이다. 거기에 우리가 날마다 머무는 것을 닦아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그것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조용한 때와 장소에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과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명상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계략이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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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생명이다'라는 말씀의 선포에 마음을 열고자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을 빛내고 있는지 점검하고, '생명'을 갈고 닦아 빛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나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날마다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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