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표징 

- 서로 사랑하라 -

- 요한복음 13:31-38 -

 

[요한복음 13:34-35] "34.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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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장은 '자기 것을 사랑하신' 아들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으로 시작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서로 사랑의 명령으로 끝을 맺는다. '서로 사랑하라'는 서로 사랑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징이다. 요한의 편지에서도 이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1. 예수님이 주신 '새로운 계명'

 

'새 계명'''라는 단어는 '카이노스' καινός이다. 신약성경에서 '새롭다'로 번역되는 헬라어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네오스' νέος로 영어의 '(new)의 어원이다. 신문은 하루만 지나면 낡은 신문이 되듯이 '네오스'의 새로움은 시간이 지나면 낡아진다. 하지만 또 다른 '카이노스' καινός는 지금까지 없었던 질적인 새로움을 의미한다. , 예수는 기존의 구약의 가르침과는 다른 새로운 사랑의 가르침이다. '새로운 가르침'은 예수님 자신이 모범으로 보여주신 사랑에 기초한 사랑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로 실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요한복음 14:15,21, 15:12,17에서는 '새 계명''나의 계명'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그 속뜻은 모두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새 계명'에 대한 '옛 계명'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5:38-4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하신 것을 너희가 들었느니라.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에게 손을 대지 말라."

 

(2) "너희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고 말씀하신 것을 너희가 들었느니라.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예수님은 명령하실 뿐 아니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힘도 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의심한다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거나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것과 같다(마태복음 7:6 - '''돼지'는 모두 악한 영들을 의미한다).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킨다는 뜻이다. 사랑으로 사는 자에게 사탄은 피해를 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의심하고, 상처를 주는 것은 '거룩한 것'(사랑)을 개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예수님의 '새 계명'이 짓밟히고, 찢겨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짓밟히고 찢어지는' 현실이 일어나면 우리의 마음의 평안을 빼앗기고 몸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날 많은 질병의 질병이 이런 원인으로 인한 것이라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롯의 유다처럼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마음의 생각은 종종 입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그 기저에는 항상 교만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연약함을 가진 존재이다. 교만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평안이 올 것이다."(마태복음 11:29)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내 멍에를 메고'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2.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사랑인데, 그것은 이미 예수님이 모범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것으로 보여주신 궁극적인 사랑이다. 종으로서 죽기까지 상대방을 섬기는 사랑이다. 이 얼마나 숭고하고 수준 높은 사랑인가. 그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너희가 장차 그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격려라고도 할 수 있다.

 

제자 베드로는 13:36에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올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 여기에 '따라오다'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어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따라오다'는 그리스어로 '아콜-루세오-' άκολουθέω인데, '따르다, 동행하다, 따라가다, 같은 길을 걷다'라는 뜻이다. 이 동사는 1:3712:26에도 사용된다.

12:26에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거든 나를 따르라(άκολουθέω).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있어야 하리라.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 사람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 자각이 없는 사람은 제자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시점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따라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과 '새 계명'으로서의 '사랑'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3. 먼저 나부터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의 전제에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씀처럼 '먼저 나부터'라는 말씀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이 점에서 저는 여러 번 실패한 어리석은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나 인내로우신 분이신가.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거듭 용서하시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마음에 품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

 

(1) '미안해요, 죄송해요' 한 마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상대방이 원치 않더라도 '미안하다'고 말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은 모든 교제를 회복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지만, 왠지 쉽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 즉시, 상대를 용서하기

상대를 즉시 용서하는 마음가짐을 평소에 훈련하지 않으면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결국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자신을 속박하게 된다. 용서하는 마음을 내 안에 품고 있으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되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1)(2)를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마음과 상대방 사이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눈에 보이는 희생적인 사랑'이었다. 그 사랑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다. 그런 사랑의 영향력을 발산하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거룩한 두려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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