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개념의 변질

오늘날 교회의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선교 개념의 변질이다. 전통적으로, 선교(宣敎, mission)는 주 예수께서 교회에 명하신 전도의 사명을 가리켰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얻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가장 귀하고 중대한 임무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에 대한 이 전통적이고 성경적인 개념이 변질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를 단지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활동으로 보지 않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행해야 할 사회적, 정치적 책임과 활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 개념의 변질에 대한 증거들

오늘날 선교의 개념이 변질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몇 가지 예들을 들어보자.

1967년, 미국 연합장로교회(지금의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다른 소위 ‘1967년 신앙고백’을 채택했는데, 그 고백서는 교회의 사명[선교]에 대해 이렇게 진술하였다:235)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은 그의 화목케 하시는 공동체로서 세상 속에 보내지는 것이다. 이 공동체 곧 세계적 교회는 하나님의 화목의 메시지를 위탁받았으며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키는 적의(敵意)를 고치시려는 하나님의 수고에 참여한다(2.1.1).

교회의 회원들은 화평의 밀사(密使)들이며 정치, 문화, 경제면에서 세력 있는 자들이나 집권자들과 협력하여 인간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바로 이 세력들이 인간의 안녕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에는 가장(假裝)과 부정(不正)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1.3.1).

인간을 향한 그의[그리스도의] 봉사는 교회가 모든 형태의 인간 복리를 위하여 일할 것을 위탁한다. 그의 수난은 교회가 인류의 모든 고통에 대해서 민감하여 각종 궁핍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도록 만든다(2.1.1).

교회는 모든 민족 차별의 폐지를 위하여 노력하며 그것으로 인해서 상해를 받은 자들을 위하여 봉사한다(2.1.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 사업은 인간생활 전체 곧 사회와 문화, 경제와 정치, 과학과 기술, 개인과 단체, 전부를 포괄한다(3.1.1).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에서 강조되는 선교 개념도 이런 개념이다. 1980년 멜본에서 열린 WCC의 세계 선교 및 전도 대회는 말하기를, “인권을 위한 투쟁에의 참여는 그 자체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말과 행위로 선포할 교회의 전체적 선교의 중심적 요소이다”라고 했다.236) WCC의 전 총무 필립 포터도 주장하기를, “우리는 경제적 정의와 정치적 자유와 문화적 갱신을 위한 투쟁을 하나님의 선교를 통한 세계의 전체적인 해방의 요소들로 본다”고 했다.237) 심지어,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사회적인 전도 개념을 말하기를, “복음 전도에서 우리는 개인적 문제의 해결뿐 아니라, 창조세계 질서 전체의 변혁을 목표한다”고 하였다.238)

WCC 1983년 선교와 전도 선언도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개인의 회개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 . . 복음 전도는 이 세상의 구조들, 즉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제도들에 대해 말한다”고 했다.239)

WCC의 이런 선교 개념은 특히 1961년 국제선교협의회(IMC)가 WCC 세계 선교 및 전도위원회로 통합된 후 그 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필립 포터의 지도 아래 나타났다. 그 후, 그 개념은 1968년 WCC 웁살라 총회에서 공적으로 제안되었고, 1973년 방콕에서의 세계 선교 및 전도 대회에서 강조되었다. 이것이 소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혹은 ‘전체적(holistic) 선교’ 개념이다. WCC의 현재 상태는 이전 역사의 계속일 뿐이다.240)

미국의 9개 교단의 통합을 추구하는 교회연합 협의회(COCU)도 선언하기를, 교회의 공동적 선교(사명)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라고 했다.241) 레온 왓츠 같은 이는 심지어 사회 활동을 교회의 일차적 사명[선교]이라고 강조하였다.242)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선교 개념이 선전되고 있다. 1996년, 한국 개혁신학회 제1회 정기학술심포지엄에서 장로회신학대학(예장통합)의 이형기 교수는 “한국 개신교의 나아갈 방향: 선교신학의 입장에서”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데 초점을 두었던 19세기 선교 개념이 20세기 교회연합운동에서는 교회의 사회 참여 측면을 포함하게 되었다고 전제한 후, 이 두 흐름의 선교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전체적(whole)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43) 이것이 소위 ‘전체적 선교 개념’ 혹은 ‘넓어진 선교 개념’이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이러한 ‘넓어진 선교 개념’을 받아들인다. 1974년 복음주의자들의 로잔 언약은 교회의 사명에서 전도가 일차적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전도와 사회정치활동의 불가결의 연관성을 강조함으로 선교 속에 두 요소를 포함시키는 경향을 이미 보였다. 로잔 선교대회의 지도적 인물인 죤 스토트는 고백하기를,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마 28:19]의 결과들뿐 아니라 그 실제의 부탁 자체가 전도의 책임뿐 아니라 또한 사회적 책임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나는 지금 더 분명하게 본다”고 하였다.244)

개혁주의에큐메니칼협의회(RES) 총무 폴 슈로텐보어도 말하기를, “전도는 일차적이지만 또한 예비적이다. 전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개인적 회심과 구조적 개혁을 요청해야 한다”고 하였다.245) 그는 선교가 아니고 전도에 대해 ‘전체적 개념’을 주장한 것이다.

사회정치적 행동주의

우리는 오늘날 교회들에서 선교 개념의 변질뿐 아니라, 사회정치적 관심과 행동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WCC 헌법은 그 단체의 한 기능을 진술하기를, “인간의 필요에 대한 봉사, 사람들 간의 장벽들의 제거, 및 한 인류 가족의, 정의와 평화 증진에 있어서의 교회들의 공동적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246) 데이빗 스토우는 1980년 WCC 멜본 세계선교와 전도대회에 관해 말하기를, “멜본 대회는 사회 활동에 관한 대회보다 훨씬 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문제들에 집중하였다”고 하였다.247)

교회연합운동가들은 사회적 관심과 활동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그들은 또한 가난과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의 근본 문제이며, 따라서 이상적 사회는 모종의 사회주의적 사회라고 암시한다. 데이빗 스토우는 말하기를, “멜본 대회가 불평등한 경제 구조를 천국에 반대되는 주요 표현으로 인식했으므로, 그 대회는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와 같은 어떤 이상, 즉 어떤 형태의 사회주의를 불가피하게 안출하였다. 약간 부드럽게 명명되는 ‘중앙설계경제’는 여러 방식으로 새 세계의 선구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인류 역사에 새 장으로서 암시되었다”고 하였다.248)

또 교회연합운동가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우월권을 주며 그들의 투쟁에 연대의식을 가지고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그들은 단지 이론적 변론이 아니라, 투쟁의 행위를 강조한다. 1968년 WCC 웁살라 총회는 말하기를, “인류의 갱신은 지역사회에서 인종과 계급의 모든 배타성을 찾아내고 폐위시킴으로써 또 인간의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강등과 착취에 대항해 싸움으로써 시작되어야만 한다”고 하였다.249) 에밀리오 카스트로도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선포는 그 나라에 참여하는, 그 투쟁에 참여하라는 초청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전도는 혁명적 참여가 된다”고 한다.250) 감리교 목사요 짐바브웨 대통령인 케이넌 버내너는 그의 연설문에 쓰기를,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분명한 정죄와 그것을 전복시키는 힘찬 행동이다”라고 하였다.251)

WCC 인종차별투쟁 프로그램(PCR)은 그 단체의 사회정치적 관심과 행동주의의 대표적 예이다. 그 단체의 인종차별투쟁 프로그램은 1970년 이후 남아프리카의 ‘아프리카 국가회의’(ANC)와 나미비아의 ‘서남 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 등 과격한 마르크스주의 폭력단체들에게 1992년 9월말 현재 1,007만불 이상을 지원하였다.252)

근래에 교회연합운동과 공산주의와의 연관을 증거하는 자료들이 드러났다. 소련의 통신사이었던 타스 통신은 러시아 비밀경찰 요원들과 동독의 비밀경찰이 유럽 교회들의 대회와 WCC에 침투하였으며 1984년에 에밀리오 카스트로의 WCC 총무 선출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도하였다.253) 3천명이나 되는 많은 교직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정보제공자들로 행동했으리라고 하며, 일부의 러시아 정교회 신부들과 지도자들은 위험이 없이 그들의 일들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감시하는데 그들의 성직자의 복장을 사용하였다고 한다.254) WCC는 1961년 이후 공산세계의 교회와 러시아 비밀경찰인 성직자 회원들을 가지고 있었다.255)

1986-1987년 미국 연방수사국(FBI) 보고서에 의하면, 소련 사람들은 미국교회협의회(NCC)나 WCC를 그들의 선전 목적들에 사용했고 공산 정부의 통제 아래 있는 러시아 정교회는 이것을 조종하였다.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는 보도하기를, 러시아 정교회는 공산주의 아래의 정부의 도구이며 “어떤 정교회 신부들은 단순히 비밀경찰의 협력자들로서가 아니고 실제적 요원들로서 활동하였다고 보인다”라고 하였다.256) 특히, 게하르트 베지에르, 아르민 보이엔스, 게하르트 린데만 등 독일의 학자들은 WCC가 동유럽의 정보기관들에 의해 침투를 당했고 전 회장들 중의 한 사람인 메트로폴리탄 니코딤(Nikidim)이 러시아 비밀경찰요원이었음을 확증하였다.257)

넓어진 선교개념의 오류

그러나 오늘날 자유주의자들과 교회연합운동가들과 또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넓어진 선교 개념’ 즉 ‘전체적(holistic) 선교 개념’은 정당한 것인가? 교회의 사명(mission)은 복음 전도 외에 사회정치활동을 포함하는가?

우선 ‘교회의 선교’라는 말을 정의해보자. 교회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은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즉 교회는 하나의 단체이다. 또 선교(宣敎)란 문자적으로는 ‘교(敎)를 선전하는 것’이라는 뜻이지만, 영어의 미션(mission)은 ‘특수한 임무’ 즉 ‘사명(使命)’이라는 뜻이다. 웹스터 영어사전은 그것을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맡은 특수한 임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 교회의 선교란 단체로서의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성도들의 모임인 단체로서의 교회의 사명이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뿐 아니라 사회정치활동도 포함하는가? 이것이 문제의 초점이다.

전통적 신학의 정리대로, 교회의 삼대 임무는 예배와 영적 건립과 전도이다. 예배는 교회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기본적 임무이다. 교회 즉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드려야 한다(요 4:23; 엡 1:14). 영적 건립은 교회가 자체를 향해 가지는 임무이다. 교회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성장시켜 온전케 해야 할 임무를 가진다. 이를 위하여, 주께서는 교회에 직분자들을 주셨고, 교훈, 기도, 권징, 교제, 봉사, 구제의 일을 하게 하신다(마 28:20; 행 2:42; 엡 4:11-12). 특히 초대 교회에서 헌금의 용도인 구제는 교인들 중에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다(행 6:1-2; 고전 16:1-2; 고후 8:4; 9:1).

전도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세상을 향해 가지는 임무이며 이것이 주께서 세상에 남겨두신 제자들 즉 교회에 주신 특수 임무, 즉 사명(使命, mission)이었다.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마가복음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요한복음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또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의 계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전도의 일이었다. 마태복음 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전통 본문).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6: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어떤 이들은 주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일이 사회봉사활동에 해당하며 그것이 주의 사명의 일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의 가르치심과 전파하심의 일과 분리된 것이 아니고 그 일에 종속된 부차적인 것이었고, 더욱이 주께서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단지, 긍휼과 능력이 많으신 구주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실 때 불쌍한 병자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고쳐주신 것이었고, 또 그러한 치료의 기적들을 통해 자신의 신성(神性)을 증거하셨던 것이다.

또한, 병고침을 받은 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왔던 자들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찾아다니신 것이 아니고 그에게 찾아온 자들을 고치셨고, 또 그에게 나아왔던 자들은 대부분 그를 믿었던 자들이었다(마 8:2, 5, 10, 16; 9:2, 22, 29). 그러므로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일은, 오늘날 교회가 교회 안에 병든 성도들을 돌아보는 일이나 혹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병자들을 치료하는 행위에 해당하지, 독립적인 의료 활동이나 교회의 사회정치활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자신의 사명 즉 선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J. 그레셤 메이천은 말하기를, 선교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한 분 하나님과 인류의 보편적 죄악성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258) 로버트 홀 글로버도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참 사명은 주님의 사명과 동일한 것, 즉 국내에서나 먼 나라에서나 간에 잃어버린 자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그들을 찾아 구원하는 것이었고 또 언제나 계속 그래야 한다. . . . 초대교회는 오늘날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상황들과 문제들을 직면하였지만, 사회 복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오직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떤 변명도 없이 개인 구원의 유일한 복음을 전파하였다.259)

해롤드 린젤은 “선교와 전도는 중심에서 동의어이다”라고 말했고, 알랜 티펫도 선교를 “잃어버린 자들을 그에게로 인도하여 구원얻게 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이라고 정의하였다.260) 또 1970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선교가 영원한 구원을 증거하고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261) 그 선언의 초안자 피터 바이엘하우스는 “고전적, 전통적 선교 개념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262)

더욱이, 사회정치활동이 교회의 임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첫째, 주 예수께서는 사회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그는 형의 유업을 나누어 달라는 어떤 이의 요청을 거절하셨고 자기를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하셨다. 누가복음 12:13-14,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요한복음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또 그는 빌라도 총독 앞에서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둘째,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회정치활동을 명령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는 그들에게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를 명령하셨다. 복음서들의 마지막 부분들과 사도행전의 첫부분은 이 사실을 밝히 증거한다(마 28:19; 막 16:15; 눅 24:47-48; 요 20:21; 행 1:8).

셋째, 주의 제자들 즉 초대 교회는 사회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이 확증하는 바다. 사회정치문제에 대한 신약성경의 교훈은 소극적이고 온건하다. 신약성경은 성도들이 사회의 질서를 존중하고 위정자들에게 복종하고 규정된 세금을 바치고 또한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칠 뿐이다(롬 13:1-7; 엡 6:5-9; 골 3:22-4:1; 딤전 2:1-2; 벧전 2:13-20).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대 사회적 말씀들은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에게 해당되었던 것이므로, 오늘날의 세속사회에 직접 적용되지 않고 일차적으로 교회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宣敎, mission)는 주 예수께서 교회에 명하신 전도의 사명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주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얻게 하는 사명이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가장 귀하고 중대한 임무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 가운데서 선교에 대한 이 전통적이고 성경적인 개념이 변질되었다. 선교를 단지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활동으로 보지 않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행해야 할 사회적, 정치적 책임과 활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소위 넓어진 선교 개념은 잘못된 개념이다. 그것은 교회의 사명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이와 같이 많은 교회들이 자신의 사명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적, 전통적 입장에서 크게 이탈하였다. 교회의 사명에 대한 개념의 변질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에 무엇을 첨가하려는 생각은 하나님의 뜻에서 이탈하는 중대한 오류이다.

많은 순진한 성도들이 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선교를 위한 후원자가 되지만, 우리가 선교에 대한 순수한 성경적 개념을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고 역사적 기독교가 믿고 행해온 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다 구원해내어야 한다. 사회정치활동은 아무리 좋은 일일지라도 주께서 주신 이 숭고한 전도의 임무에 첨가될 수 없다. 교회의 사명은 오직 이 한가지, 즉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교다.

사회정치적 행동주의의 오류

또한 이와 더불어 오늘날 교회들의 사회정치적 관심과 행동주의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옳지 않다.

첫째, 사회적 관심과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별개 문제이다. 사회적 관심과 행동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척도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여러 부분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둘째, 가난과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의 근본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근본 문제는 단지 물질적인 것이나 자본주의적 사회 구조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니다. 사회의 근본 문제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사회의 근본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있는 죄악된 상태에 있다.

셋째, 가난은 항상 사회 구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게으르고 낭비하는 자가 가난해지는 경우도 많다. 잠언 6:10-11,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넷째, 가난한 자들에게 무조건 우월권을 주는 것은 정당치 못하다. 오히려, 성경은 가난한 자들을 두호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출애굽기 23: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레위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 . .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다섯째, 이 세상에서 공평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은 실상 불가능하다. 먼저 사람의 죄악성이 제거되지 않고서는 이상적 사회는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으로 세상에서 악인들이 다 제거되기 전까지 이상적 인간 사회의 건설은 사실상 불가능한 꿈에 불과하다.

여섯째, 오늘날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유, 특히 종교적 자유의 박탈과 탄압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보다 더 큰 사회적 문제이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공산주의 혁명과 같은 폭력적 행위를 인정할 수 없다.

그러면, 사회의 개선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대책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복음 전도를 통해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켜야 한다. 사회의 근본 문제는 인간의 죄악된 마음에 있다. 그러므로 사회의 진정한 개선은 단지 사회 구조의 개선이 아니고 인간 개조이어야 한다. 마음의 변화가 사회 구조의 변화보다 앞서야 참된 사회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전도를 통한 영혼구원과 인격의 변화는 사회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적 대답이다.

둘째로, 우리는 먼저 우리의 집과 교회를 모범적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를 모범적이게 만들지 못한 채 사회 개혁을 위해 활동하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다. 중생한 공동체가 이상적이게 되지 못한다면, 중생치 못한 세속사회가 어떻게 이상적 사회가 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직업과 시민으로서의 의무의 수행을 통해 사회 정의의 실현과 사회 개선을 위해 힘써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치, 경제, 법률, 과학, 교육, 신문 방송, 예술 등 그의 직업의 모든 분야에서 모범적으로 활동함으로써 그가 책임 있는 윗사람일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혹은 그가 아랫사람일 경우에는 간접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할 것이다.

또 모든 그리스도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른 동료들을 겸손히 설득하며 그들의 양심에 호소함으로써 사회 정의 실현과 사회 개선을 위해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시민으로서 우리의 사회가 허용하는 합법적 방법을 통해 점진적인 사회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와 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들의 생활의 방식을 변화시키려고 물리적으로 강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상,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심령들에게 참되고 온전한 도덕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인내하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할 것밖에 없다.

 

http://www.oldfaith.net/03modern.htm#20. 교회의 바른 진로(進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