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의 선교신학을 위한 방향 진단”에 대한 응답

http://kcm.kr/dic_view.php?nid=40958&key=&kword=%BC%B1%B1%B3&page=


신학과 선교의 통합: 이론과 실천의 통합

 

정흥호 교수님은 이번 발제를 통해서 선교와 신학은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선교의 기초는 사회과학이 아니라 성경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실용주의적 선교 및 관리적 선교학(managerial missiology)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환기시켜주었다.


신학과 선교의 분리는 다르게 말하면, 이론과 실천의 분리라고 할 수 있다. 이론과 실천의 분리는 타락한 인간의 연약함의 표출이지만, 동시에 계몽주의 이후 헬라적 진리관이 득세함으로써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헬라적 세계관에서는 진리 탐구란 변화하는 세계, 즉 현상계 배후에 변화하지 않는 불변의 실체(substance)들의 속성과 본질을 지성(mind) 차원에서 규명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즉 진리 탐구는 지성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작업이며, 따라서 실천은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 단순히 진리(이론)의 적용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이론과 실천은 더욱 확연히 분리되었고 실천에 대한 이론의 우위가 확립되었다.


이런 진리관은 서구의 세속대학 뿐 아니라 신학교 안에서도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신학은 이론 신학과 실천 신학으로 나뉘고, 이론 신학이 실천 신학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이론과 실천의 과도한 분리 때문에 이론(신학)은 실천 현장과 연관성(relevancy)을 잃게 되고 실천은 이론(신학, 혹은 성경)적 근거를 잃게 만들었다. 선교가 신학적 혹은 성경적 근거를 갖지 않으면 오늘날 학문세계의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 따라서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방법론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세계관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방법론이 전적으로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방법론에 의식, 무의식적으로 전제되어있는 세계관적 전제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선교 방식은 “성경에 기초한 선교신학-->선교사역철학-->방법론-->모델-->현지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 기초한 선교신학이 부재하게 되면 방법론은 항상 성경적 원리보다는 실용주의를 취하게 된다.


진리에 대한 헬라적 관점에서 벗어나서 히브리적, 동양적 관점에서의 진리관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즉 이론만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 실천도 진리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정통교리(orthodoxy)만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 정통실천(orthopraxis)도 진리의 영역이라는 의미이다. 데이빗 웰스(David Wells)가 그의 저서 <신학실종>(No Place for Truth)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앙고백(confession) 뿐 아니라, 신앙고백에 대한 성찰(reflection), 앞의 두 가지에 기초한 미덕(virtue)의 개발까지 모두 진리의 영역이다. 실천이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 단순히 진리의 적용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실용주의로 흘러가고 실천의 진리성 문제를 따지지 않게 된다.


신학교육의 문제


정교수님이 신학교육과 선교교육의 문제를 지적한 것도 현재 한국 선교의 상황에서 볼 때 의미 있는 주제이다. 신학교육에서 성경 신학(성경에 기초한 신학)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원칙이라고 생각된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볼 때는 마치 당연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따라서 신학의 기초를 성경이 아니라 사회과학이나 철학 등에 두려는 것에 대한 지적으로 보인다. 복음주의 진영의 신학교육에도 개선할 것이 있다. 복음주의 진영의 신학교의 문제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론과 실천의 분리 문제이다. 즉 현장성을 결여한 이론 신학과 성경적 기초를 결여한 실천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주의 진영의 경우 신학교육이 실용주의적인 경우보다는, 오히려 신학교육에서 이론에만 치중하여 실천을 진리의 차원에서 성경에 기초해서 다루지 않기 때문에 공백이 생기고, 그 결과 실천의 영역이 실용주의로 흘러가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신학교육의 목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정교수님이 지적했듯이, 신학교육의 목표는 첫째는 교회지도자의 양성이요, 둘째는 문화와 상황에서 제기되는 질문에 응답하는 신학의 생산이다. 물론 기독교 전통에서 확립되어온 정통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우선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신학훈련(theological training), 영성훈련(spiritual training), 사역훈련(ministry training)이 필요하다. 그러나 헬라적 진리관에 기초해서 세워진 서구적, 한국적 신학교에서는 영성훈련이나 사역훈련은 상대적으로 결여되기 마련이다. 서구식 신학교 모델에서는 이론을 진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신학 이론만 지식 차원에서 전수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이미 서구와 한국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서구식 신학교육을 선교지에 이식하는 것에 대해서 제고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서구에서 교회 지도자 양성의 모델을 찾을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제자들을 훈련시켰는지의 모델을 찾아보아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신학의 생산이다. 정교수님이 지적했듯이, 진정한 신학은 상황 속에서 배태된다. 복음의 핵심은 초문화적인 것이지만, 이 초문화적 복음이 어떤 문화에 들어가게 되면 새로운 상황에서 질문들이 제기된다. 신학은 새로운 상황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성경적 해답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신학은 도서관에서 그냥 나온 것이 아니며, 칼빈의 신학도 도서관에서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선교적 상황과 종교개혁적 상황 속에서 치열한 “신학함”(doing theology)의 결과이다. 바울의 일차적 정체성은 신학자가 아니라 선교사였을 것이며, 칼빈의 일차적 정체성도 신학자라기보다는 종교개혁자요 사역자였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립신학(self-theologizing)이 이해되어야 한다. 복음이 어떤 문화에 들어가면 그 문화와 상황에서 제기되는 질문에 대해서 충실히 대답해야 하며,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현지인들이 그들의 개념과 범주와 사고방식을 사용해서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격려되어야 한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나는 복음에 대한 이해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자유주의 진영의 신학교육이 사회과학에 치우쳐 있다면 복음주의 진영의 신학교는 오히려 사회과학의 부족으로 인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복음주의 진영 안에 여전히 해석학과 문화에 대한 이해의 결여가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근대주의 인식론의 관점에서 인간의 이성이 오류 없이 객관적으로 성경 저자의 의도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해석학적 전통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교조주의에 빠진다. 근대주의적 인식론은 상황화를 거부한다. 상황에의 영합(혼합주의)과 성경적 상황화(복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음)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 상황화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문화적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종종 혼합주의에 빠져있는 것을 본다.


교회는 신적기관이며 신학은 해석학적 공동체(hermeneutic community)인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 안에서의 교제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자립신학은 폴 히버트(Paul Hiebert)의 주장대로 국제적 해석학적 공동체(International Hermeneutic Community) 안에서 제시되어서 상호 견제되고 격려되어야 한다.


선교교육의 문제


선교교육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정교수님은 선교교육에서 지나치게 사회학이나 문화인류학과 같은 사회과학에 치중하는 것에 대해서 적절하게 경계함으로써 균형을 잡도록 지적해주었다.


사회과학적 방법론의 문제점은 효율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근대과학 이후의 과학정신이다. 과학혁명 이후 이신론(deism)이 등장하면서 목적론적 세계관이 붕괴되었다. 자연은 초자연으로부터 독립된 폐쇄적 시스템으로 간주되었으며 자연의 현상 안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찾는 것이 과학의 목적이 되었다. 그리고 원하는 결과(목표)를 위해서 원인을 조작하고 통제하는 것이 기술이 되었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탐색하는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합리성이며, 원인과 결과를 통제하는 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성이다. 기술에서 에너지 효율성이 강조되었다면, 이 효율성이라는 가치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영학의 관점에서 자본의 효율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성경적 재생산성(reproducibility) 개념보다는 효율성의 가치가 더 중요한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성경적 가치를 애써 추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우리 시대의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인 효율성의 가치에 매몰되는데 이것이 곧 실용주의로 나타난다.


합리성과 효율성의 가치는 종종 믿음이나 부르심과 같은 성경적 가치를 약화시키고 정교수님이 지적한 것처럼 직업의식화를 강화시킨다. 그런 면에서 합리성과 효율성과 같은 근대적 서구적 가치에 상대적으로 덜 물든 한국 선교사가 보다 성경적 선교를 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가 서구적 경영학적 선교학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성경에 기초한 한국적 선교학과 선교신학을 계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알 수 있다.


정교수님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에서 개인 회심이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은 적절하고 균형 잡힌 것이다. 선교신학이 구원론에 입각한 복음의 본질에서 시작해야 함을 지적한 것도 중요하다. 흔히 하나님 나라와 통치를 강조할 때 창조를 강조하는 신학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도록 사회변혁과 문화변혁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앞당겨져서 실현되는 곳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미래에 지구 전체적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미리 보여주는 샘플로서 희망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데이빗 보쉬(David Bosch)가 그의 저서 <변화하고 있는 선교>(Transforming Mission)에서 지적한 것처럼 선교 신학(theology of mission)이 아니라 선교적 신학(missional theology)이 절실히 필요하다. 모든 신학연구는 세계복음화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신학이 교회를 위한 것이고, 선교가 교회의 본질이라면, 신학은 항상 선교적 신학이어야 한다. 조직신학도 선교적 조직신학이고, 성경신학도 선교적 성경신학이고, 역사신학도 선교적 역사신학이어야 한다. 이 말은 모든 신학은 실천의 현장,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성 안에서 연관성(relevancy)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정교수님이 선교학 연구와 선교교육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이 근원적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선교교육이 지나치게 문화인류학이나 사회학 중심이어서는 균형이 잡힐 수 없다. 서구적 모델의 선교훈련 외에 어떤 선교훈련이 성경적인 것인지 계속 탐색하고 고민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