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복음에 나타난 선교사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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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에 나타난 선교사상 연구

 
목 차
Ⅰ.서론
1.문제제기와 본 논문의 중요성
2.연구의 범위와 방법
Ⅱ.예수의 선교사상 이해를 위한 기초
1.복음서의 기록과 중요성
2.예수에 대한 이해
1)역사적 사실과 신앙
2)구약과의 관계
3)복음과 교회
Ⅲ.공관복음서의 선교사상
1.마가복음
1)이적기사를 통한 선교적 관점
(1)바다 이적
(2)장애자 치유이적
2)마가복음의 인종적 관심
(1)제자들의 무지와 오해
(2)이방인 백부장
2.마태복음
1)유대적 경향
(1)유대적 배타주의
(2)이방에 대한 개방성
a.족보
b.이방의 구원
c.비유
(3)두 선교명령의 대치
3.누가복음
1)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됨
2)구원사의 연속성과 선교사상
3)예수의 기도에 나타난 선교사상
4.공관복음의 비유들을 통해 나타난 선교사상
1)씨 뿌리는 비유
2)겨자씨 비유
3)밀과 가라지 비유
4)그물 비유
5)감추인 보화와 귀한 진주의 비유
6)포도원 농부의 비유
Ⅳ.선교의 선구자 되신 그리스도
1.선교의 주제와 원리
2.대전환점
Ⅴ.결론
1)요약
2)적용


 Ⅰ.서 론

1.문제제기와 본 논문의 중요성

막스 워렌(Max Warren)은 그의 책 '나는 복음 선교를 믿는다(I Belive in the Great Commisson)'에서 "예수님 자신이 바로 위대한 선교적 사명의 모든 것"이라고 언명했다. 즉 그는 "보내심을 받은 자이시며" 또 "그 자신이 메시지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의 생에 있어서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실천을 통하여 또한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에 의하여 그는 그의 메시지를 선포하신 것이라 할 수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확정이 신약성경안에 내포되어 있다고 믿고 이를 추적하는 것이 것이 본 논문의 목표이다. 신약 특히 공관음서는 이를 밝히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 가운데 신약의 주제들이 결국은 구약성경의 예언이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가정이 사실이라면에 교회는 그 선포의 명령에 충실할 의무를 갖게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 있어서 기독교 선교의 그 정당성은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만큼 충실하게 충성하는냐에 따라 검토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의 발언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공관복음서를 중심으로 예수의 선교사상을 검토해 볼 것이다.

2.연구의 범위와 방법

공관복음서를 중심으로 선교의 근거와 정당성을 찾으려고 할 때 선교라는 개념을 정의하지 않으면 연구의 범위가 방대하여 지므로 본 논문에서는 선교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한정하려고 한다.
선교란 "선포하다"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케루소)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은 뜻은 "보낸다"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아포스텔로)와 (펨포)와 연관하여 관련이 있는 용어이다. 도드(C.H. Dodd)는 고전 1:21을 해석하면서 "전도의"( )라는 단어안에 있는 "선포"( )라는 단어에 주목할 때, 그 뜻은 비기독교 세계에 복음을 대중적으로 설교하는 것을 의미하므로영어의 mission이라는 단어의 뜻이 이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선교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는 사건을 말하며(고전1:21) 더 나아가 예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이며(요20:21)이제 우리도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자로서 세상에 보내심을 입은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 성서적 선교개념이라 할 것이다(고전4:1). 공관복음서 안에서 선교와 관계된 제 논점들을 취급하기에 앞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나사렛 예수와 초대교회 공동체의 세계선교와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쯔웨머(Samuel Zwemer)는 전통적으로 네 가지의 견해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첫째로 헤겔(Hegel)이나 톨스토이(Tolstoi)등의 그단적 견해로서, 예수가 가진 것은 반유대적의식으로 오직 세계선교만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견해는 선교본문의 후기-부활적성격 (the post-Easter nature of the mission texts)을 지나치게 소흘히 본다는 비판을 받는다. 둘째로 이와 정반대의 견해가 있다. 즉 예수는 극단적 유대주의자였다는 것이다. 라이마르스 (Reimarus), 스트라우스 (Strauss), 벨하우젠 (Wellhausen), 하르낙 (Harnack)등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이 견해는 예수와 초대교회공동체가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관점 즉 "때"(time)에 대한 의식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종교진화론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견해로서 예수가 처음에는 편협한 유대주의자였으나 그의 생애가 끝나갈 무렵 세계선교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견해를 말한다.여기서는 카임(Keim) 하우스라트(Hausrath), 베르톨렛(Bertholet), 바이스(Bernard Weiss)등이 대표적인데, 이 견해 역시 둘째 견해와 비슷한 비판을 받고 있다. 한편 한(F. Hahn)은 "때"를 강조한 예레미야스(Jeremiss)의 견해를 또 하나의 유형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예수 자신이 이방선교를 시작하지 않았고 교회도 그의 가르침에서 선교적 교훈을 연역해 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예수의 부활이 초대교회 공동체로 하여금 구원의 마지막 때가 되었음을 확신하게 만든 결과 그렇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견해는 "보냄"을 받는 적극적인 선교관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비판을 면치 못한다. 넷째로 예수가 그의 생애 동안에 이방선교를 시작하지 않았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있었고 부활 이후에 이것을 구체적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교본문의 후기-부활적 성격(the post-Easter nature of the mission texts)을 잘 반영해주는 견해라 할 수 있다. 쯔웨머는 이 견해를 정리하여 교회의 전통적인 주장으로 제시한다. 즉 예수는 그의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전인류에 대한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특히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보내어졌음을 알고있었다. 따라서 그의 지상사역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계적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모든 인류의 구주이심을 가르쳤고 결국 세계선교의 사명을 그들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견해 역시 선교명령의 기초가 되는 예수 생애의 이방선교를 확실시 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
본 논문은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의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견해들을 극복하고 예수의 지상사역이 세계선교에 대하여 어떤 준거와 모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을 것이란 가정을 사실로 밝히는데에 있다. 다시말해 선교란 교회의 어떤 목적에 의해 생성되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께서 의도하셨고, 예수께서 주도하셨으며, 구체적으로 그것을 명령하셨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선교에 대한 사상은 예수의 말씀 뿐 아니라 그의 의도된 행동, 비유, 가르침등에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공관복음서를 통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연구의 순서로는 먼저 1장 서론에 이어 2장에서는 예수의 선교사상 이해를 위한 기초로서 복음서의 기로과 교회의 선포들을 살펴 볼 것이고 3장에서는 공관복음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선교 의도를 찾아 볼 것이다. 즉 예수의 지상사역을 통하여 나타난 이방선교의 맥락이 과연 부활 이후의 교회의 최대관심사라고 할 수 있는 세계선교의 국면에 얼마나 깊은 교훈과 모본을 제시하는지를 공관복음을 통하여 감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4장에서는 현대교회의 선교에 대한 제 방법을 검토하려고 한다.
 
Ⅱ.예수의 선교사상 이해를 위한 기초
 
1.복음서의 기록과 중요성

초대교회에에서는 사실 기술된 복음서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생생한 구전 전승(oral tradition)이 풍부하게 존재했고 누구나 주님이 곧 다시 오실 것이란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으로부터 직접 복음을 들었고 목격하였던 1세대 기독교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갔지만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고 로마의 압제나 암울한 세상의 환경은 변함이 없었다. 이에 반발한 유대적 광신주의 자들로 인하여 공포와 소동이 일어나고 기독교공동체의 존립이 위협받는 시기에 종말론적 기대와 함께 이단들이 일어났다. 이를 바라보는 제2세대 기독교인들중에서 그러한 변질을 묵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우리중에 이루어진 사실에"(눅1:1)대한 기록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 책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진실한 설교자라면 꼭 가르쳐야 할 최소한의 것을 제공하여 주었고 또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것들을 제시하여 주었다. 이와 같이 공관복음서는 교회의 선교사역의 현장에서 출현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말은 당시의 선교적 상황에 의하여 복음서가 만들어 졌다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복음서 중에서 최초의 기록으로 보여지는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이라"(막1;1)는 설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복음"( )이라는 말의 뜻이 바로 "좋은 소식"인 것이다. 이 기쁜 소식은 그 근원이 역사적 사실에 있다. 그 순서도 역사적으로 잘 조화되어 있다. 브르스(F. Bruce)는 "기독교는 어느 특별한 시간과 관련이 없는 일반 종교나 철학적 체꼐와 구별된다. 이는 그리스도의 '모든 사람을 위한 단한번의(once-for-all)'의 구속사건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즉 복음그 자체는 온 인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마지막 단계가 실현되었음을 알리는 신적 선포이며 하나님이 계시하신 사실의 선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복음서가 예수의 인생행로와 예수의 공생애 기간 3년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서 그 기록을 "일대기", "전기"(biography) 혹은 연대기도 아니다. 존 드레인은 복음서들이 예수의 전기적 성격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결코 일반 범주에 속하는 그런 전기물은 아님이 분명하다.심지어 예수의 공생애에 관한 기록이라도 각 복음서는 그의 사역에 대한 선별적 기사로 이루어져 있다.
 
2.성경적 기초

 1)역사적 사실과 신앙
복음서들이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한 선별적 기사로 간주되고 있다고 해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브레데(W. Wrede)는 마가복음이 단순한 예수를 메시야처럼 묘사한 고도의 신학적 문서라고 규정했고 벨 하우젠(W. Wellhausen)은 브레데의 주장을 공관복음서에 확대적용하여 "공관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전기라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가 고백한 신앙의 보도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연구는 양식비평(form criticism)의 방법을 사용하는 학자들에게 인수 도니었고, 결국 "복음서들은 본래 고립된 자료의 단편들(units)로 구성되었는데 그 단편들은 역사적 보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설교하고 가르치고 기타 활동을 하는 데 나라마다 필요로 하는 것에 부응하기 위하여 형성되었다"는 주장으로 귀속 되었다.. "달리 말해서 그 자료는 역사적 목적 보다 오히려 선교적(kerygmatic) 목적을 위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입장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불트만(R. Bultmann)은 복음서들 안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대부분을 초대교회의 산물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즉 교회가 복음 이야기의 양식을 통하여 신자들의 믿음을 표현하였기 때문에 복음서는 하나의 신앙고백일 뿐이라는 것이다. 불트만은 부활에 있어서 그것의 의미성이 이해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은 아니다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역사외 케뤼그마의 단절이 일어난다. 결국 신앙이 실제의 역사로부터 끊어지게 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또 복음서 기자들의 신학적 동기와 주제를 연구하는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의 방법에서 보면, 복음서 기자들은 단순한 전승의 편집자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수집하고 배열한 그 복음 전승의 해석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스을 해석함으로서 그들 자신의 신학을 쓸 수 있었으며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 어떤 말씀들도 쓸 수 있었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된다.
인간 예수의 이해에 도달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시도를 해오던 학자들이 20세기에 이르러 인간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괴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이유를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그들의 필요에 의해 예수의 입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말을 집어 넣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와 초역사적 그리스도 사이의 간격은 그들이 에수의 부활을 사실로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트만은 부활이 십자가의 구속적 의미를 선포하는 신화적 방법이라고 말하고 보른캄(G. Bornkamm)도 콘첼만(H. Conzelmann)도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가?"라고 되물으면서 "역사가가 본문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의 실제가 아니라 제자들의 부활절 신앙이다"라고 부활을 폄하한다.
많은 학자들이 이처럼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믿지 못하고 실존주의적으로 도피함으로써 "부활의 사실"이 "부활 신앙"으로 붕괴되고 말아 버렸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몸의 부활을 배제하고는 예수의 인격의 일관성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복음서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래드(G. E. Ladd)의 주장 처럼 구약에서 약속된 때가 차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고(막1:15, 눅4:21, 마4:14이하) 그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2)구약과의 관계
누구든지 구원에 대한 구약성경의 배경을 중심하여 예수님의 일생을 연구해 볼 것 같으면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중요한 문제들에 놀라게 된다고 바빙크는 말한다. 이를 테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여러번 메시아의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메시야의 오심은 구원의 영향으로 나타나는 세계질서의 극적인 변화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님 시대의 신학 학파들은 메시야 예언의 특수한 면만을 강조했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전체적인 면을 등한시 해버린 결과를 빚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서에 이르러서야 그 수수께끼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안에서 풀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유일한 구원의 사건을 신약의 여러 저자들이 다양하게 해석하였다는 점에서 신약신학의 다양성을 발견할 수있다. 이 구원의 사건은 성질상 역사적 이면서도 종말론적이며, 인간과 세상에 대한 헬라의 이원론적 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공관복음의 신학적 전제는 근본적으로 구약선지자들의 것과 동일하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며, 세상과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이시다. 세상은 악하지도 않고 악의 영역도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선하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살피시고 돌보신다(마 6 : 30). 인생의 기쁨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누리도록 주신 선물이다. 예수님은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축제나 향연을 비유로 들어 설명하시기도 했다. 아뭏튼 예수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기를 원하셨다.
 
3)복음과 교회
세번째 우리가 살펴 보아야할 것은 선교에 있어서 그 기초가 "교회가 먼저"인가 아니면 "복음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 문제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앞서 말한 "사실인가" "신앙인가"하는 문제와 연결고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케제만(E. Kasemann) 같은 이는 초기 양식비평학자들의 주된 과업이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우리에게 준 예수의 메시지가 거의 다 신빙성이 없고 여러 단계를 거쳤던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으로 조작된 것임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비평학자들의 발상은 복음이 교회의 신앙고백일 뿐이므로 한 사건을 달리 설명하는 모순이 복음서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그 사건의 역사적 신빙성도 희박하다는 것이다. 브론캄(G. Bornkamm)은 복음서 안에 수집된 전승이 얼마나 강하게 신앙의 이해로 판찍혀 있는지를 강조하는 실례로 마태복음 22장1절 이하의 "혼인잔치의 비유"와 누가복음 14장 16절이하의 "큰 잔치의 비유"를 들고 있다. 그는 이 두 비유가 원래 한 비유 였는데 이해는 상이하다고 한다. 따라서 누가는 마태와 다르게 말하고 있으며 더 오랜 본문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성경에서 선교의 동기를 찾는다는 것은 요원하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브루스는 법정진술의 예를 들어서 적절하게 반박한다. 즉 두 개의 비슷한 비유가 반드시 동일한 비유의 두 가지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 일테면 마치 경찰관이 두 개의 다른 교통사고를 거의 동일한 언어로 설명한다고 해서 그가 참으로 동일한 하나의 교통사고를 두 가지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 디벨리우스와 불트만의 기본가정은 초대교회가 그 자체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을 구태여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도 신빙성이 없다. 고린도전서 7장 10절과 12절에 보면 바울은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고 했고,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고 하면서 예수의 가르침과 자신의 가르침을 분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7장19절에서도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하는 예수의 가르침과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하는 마가 자신의 언급을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기자들이 그들의 복음서 보도에 있어서 그들이 살고 있던 초대교회의 "삶의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비평학자들의 주장도 조심스럽게 헤아려야 한다. 그들의 생각대로 만약 교회나 복음서 기자들이 이 말씀들을 예수의 입에 담아 예수가 말씀하신 것처럼 했다고 한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난 남고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은 빛을 잃고 마는 것이다.그들에 의하자면 이것은 결국 교회의 가르침일 뿐인 것이다.
비평학자들의 논의점은 "교회"( )라는 단어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마태복음 16장 18절과 17절에 나타나 있는 교회에 관한 말씀들은 실제로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부활 이전에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예수가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교회라는 단어는 예수가 이 땅에 오시기 200년전부터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었다.구약의 70인역에서 100번정도 "회당"의 동의어로서도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가 복음을 형성시켰다는 비평학자들의 주장은 지나친 추론이다. "삶의 정황"이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설명하는 바는 그 이야기의 조작이 아니라 기록이다. 초대교회의 어떤 "삶의 정황"도 예수 생애의 "삶의 정황"을 배제하지 않는다. 초대교회의 "삶의 정황"은 예수 생애에 일어난 사건과 그의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으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선교의 열정이 달아 올랐던 초대교회의 "삶의 정황"이 복음을 형성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삶의 정황"이 주님의 선교적 사역을 생각나게 하여 복음서에 기록하게 하였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예수의 생애야말로 오직 참도니 선교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복음이 교회를 있게 했고 또 선교가 일어나도록 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Ⅲ.공관복음서의 선교사상
 
1.마가복음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서라고 인정되고 있는 성경이 마가복음이다. 서두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1:15). 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됨을 볼 수있다. 마가복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대중속에서 행하신 예수의 사역(1:14-8:26), 둘째, 제자들에게 행하신 예수의 가르침(8:27-10:45), 셋째, 적대자들과의 마지막 논쟁과 죽음과 부활(10:46-16:8).
복음의 초점은 항상 그 자신이 복음이신 예수님에게 있었다. 마가는 아주 의도적으로 그의 책의 서두를 이렇게 달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그 복음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그것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13:10) 이었다.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능력은 그리스도 임재의 견고한 확실성에 근거되어 있으며, 이 임재는 세계의 완성을 목표로 한다. 복음서마다 부활과 선교에 대하여 강조점을 달리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인간계에 관심을 둔다("whole creation"은 인간계를 의미함)여기에서는 마태복음의 넓은 범위(하늘과 땅)가 축소되어 진다. 반면에 마가복음은 예수의 권세에 대해 보다 집약적으로 알기 쉽게 강조하고 있다.
위든(Th. H. Weeden)은 마가복음의 서술 구조를 제자들의 예수 이해와 관련시켜 설명할 때 쉽게 이해 된다고 하였다. 첫째, 무지의 단계(1:16-8:26), 둘째, 오해의 단계(8:27-10:45), 셋째, 배척의 단계(10:46-16:8). 여기에서 제자들의 몰이해는 예수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지와 오해 배척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고난받는 메시야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오해 가운데 예수를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마리아의 아들이며(행 12 : 12)바나바는 그의 삼촌이었다(골 4 : 10). 이 제2복음서는 이방인을 위하여 씌여졌다. 유대인들의 일상 용어나 풍습이 자주 설명되고 있는 것은 이 책의 독자가 이방인들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말씀보다는 그의 행동을 강조한다. '바로', '곧' 등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유뒤스(υιδσ)'라는 단어가 41회나 사용된 사실은 단적으로 이 행동의 복음이 갖고 있는 특징을 말해준다. 특히 구약의 인용이 적고 유대인의 습관 지명 족보등을 대부분 생략하였다. 마가복음은 특히 예수를 섬기는 종으로 묘사한 것이 인상깊다.
G. E 래드는 신약의 여러 저자들이 공통된 신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신약신학의 통일성을 발견할 수있다고 했다. 특히 마가복음의 인간론은 근본적으로 후기 유대주의의 원천인 구약의 것과 동일하다. 혼과 몸을 분리시키는 헬라의 이원론과는 달리 히브리의 사상은 인간을 유기적 결합체로 본다. 혼(프쉬케)는 몸의 생명이며, (막 3 : 4) 살아있는 전 인격이다(막 10 : 45). 이 사상은 혼이 몸(소마)와 서로 대체될 수있다는 점을 통해 가장 명확히 입증된다. 그러나 생명의 중심인 혼(프쉬케)는 몸 이상의 어떤 것을 함유하고 있다. 온 세상을 얻음과 프쉬케를 잃어버림 사이의 대조에서(막 8 : 36) 프쉬케는 육체적 생명 이상의 것을 뜻 한다. 이 발전이 헬라의 영향을 받았던지 받지 않았던지 간에 성경속에 흐르고 있는 인간론은 헬라의 인간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 운명은 이 세상을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몸이 부활 하는 것이라고 마가복음은 선명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막 12 : 25). 성경에 나타난 이 시대와 오는 시대사이의 차이는 헬라의 이원론이 말하는 물질과 영혼, 현상계와 본체계의 가시적 실재와 비가시적 실재 사이의 차이와 달리 죄와 의, 사멸성과 불멸성 사이의 차이를 보여준다. 성경은 근심, 쾌락, 그리고 탐욕등은 인간의 마음을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다(막 4 : 18). 인간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 세상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세상은 죄와 죽음의 영역이 되고 말았고(막 10 : 23이하)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고와 고난으로 말미암을 구속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인자사상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는 복음서가 사실상 마가복음이다. 이러한 근거는 마가복음 2 : 10에 있는 선포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예수는 중풍병자의 죄가 사해졌다는 그의 용서의 선언을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졌다"고 주장 함으로써 정당화한다. 죄 용서는 하나님의 대권이므로 서기관들은 예수의 행위를 하나님께 대한 모독으로 여기고 항의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대권을 주장함으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범주(the category of the divine)로 분류하고 있으며 그의 초인적인 치유행위는 이같은 주장의 표징인 것이다라고 김세윤은 말한다. 또 마가복음 13장 26절의 용어도 흥미롭다. 인자는 그의 택한자들을 그의 도래시에 모을 것이다. 보통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모으신다는 것이 정상이므로(요 6 : 70의 진술을 볼 때)예수께서 자기 백성들을 모으시겠다고 언급한 것은 퍽 놀라운 사실이다. 사실 바로 몇 구절 앞에서 마가는 τουζ εκλεκτουζ를 모으시는 분은 주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말하였기 때문이다.(막 13 : 20) 이것은 인자와 하나님이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하는 것을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알리고저 하는 예수의 언어 유희 였다고 할 수있다.
마가는 이러한 일련의 묘사를 통하여 예수가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고 또 고난을 받아야 할 여호와의 종이지만 그는 예수의 권세들을 보다 집약적으로, 알기 쉽게 강조함으로 (불신앙, 능력들과 질병들에 대해 월등한 능력을 나타냄) 예수의 인간을 "자유케 하시는 권세"를 말하고 있다. 마가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세상은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자유가 제한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자유케 하시는 권세와 그 분의 인자로서의 사역에 대하여 우리에게 증거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분의 사역 즉 인간의 부자유함에 대하여 자유케 하시는 사역이 예루살렘안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혜택과 그 효과는 이스라엘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온 천하'와 "만민'에게로 이어져야 할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막 16 : 15)
김연진도 이러한 의견에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능력의 주님으로 소개하고 있음에 대하여 주목해야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 종으로서의 능력이었다는 것이다. 또 마가의 메시지에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많이 묘사되고 있다. 기적은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수단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방법이 되기도한다. 그리고 마가는 선포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설교방식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선교를 중요한 사역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1)이적기사를 통한 선교적 관점
마가복음서에는 이방선교(Gentile missions)에 대한 몌수의 생애와 사역이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다. 첫 번째 부분에 집중되어 있는 이적과 기사들에서 예수의 선교적 의도를 간파할 수 있다. 이어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제자들의 무지, 결국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에 대한 유대인의 배척이 심해지고 결국 구원에 대한 이방인의 참여가 제시 되는 것으로 기록이 정리된다.(막11:17, 12:9) 특히 마지막 수난 기사는 로마 백부장의 신앙고백과 함께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는 극적 상황을 이야기한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6:39)는 고백과 동시에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방인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마가복음서의 이적들은 대략 네 그룹으로 나누어진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병자 치유, 둘째, 귀신축출, 셋째, 죽은자를 살림, 넷째, 자연이적등이다. 이러한 이적들은 예수의 메시야적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마가복음 4장 35절에서부터 8장 26절 사이에 나타나는 이적기사들은 대략 평행구조를 이루고 있다. 즉 유대인을 향항 이적과 이방인을 향한 이적이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있다는 것이다.이는 로마서 1:16에 있는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는 말씀을 시간적으로 느끼게 된다. 특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친 기사(5:21-43)는 헬라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준 사건(7:24-30)과 평행을 이루고, 5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이적(6:35-44)과 4천명을 먹이신 칠병이어의 이적(8:1-9)의 평행적 구조는 앞서 말한 선교의 맥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평행구조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1)바다 이적(4:35-41,6:45-52)
풍랑진압 기사(4:35-41), 와 예수가 물위로 걸어간 기사(6:45-52)사이에 있는 공통점에 주목해야 한다. 공통점이란 양쪽 모두 제자들의 무지(misunderstanding)와 불신앙(unbelief)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가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한 후 제자들을 구원케 된 사건의 동기는 제자들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측은히 여기는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믿음이 없느냐"고 탄식하면서도 그들을 구원해 주신 것은 이러한 예수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다시말해 예수는 그의 제자들 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해 측은히 여기고 있음에 대하여 보다 강조하기 위하여 이러한 평행구조의 편집을 하였다는 것이다. 앞서도 말하였지만 마가복음은 이방인을 위하여 기록되었다는데 대개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가 특히 이러한 제자들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평행구조를 가진 두 개의 바다 이적 기사를 기록한 것은 결국 그들 로마인들까지도 받아들이시고 나아가 모든 제국에 속하여 있는 이방인들을 용납하고 구원하시는 주님의 계획을 알리고자 함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신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케뤼그마와도 일맥상통 하는 것이다.
(2)장애자 치유 이적(7:31-37, 8:22-26)
그 다음에 이어지는 평행구조는 두 개의 장애자 치유 이적이다. 한 사람은 "듣는 일'에 있어서 그리 또 한사람은 "보는 일"에 있어서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예수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또 한 사람은 예수라는 인물을 볼 수 가 없었다.
예수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8:17-18)하고 탄식하신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고 스톤하우스(N. B. Stonehouse)는 말한다.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그 때가 되면,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벙어리가 말하며 장님이 보게되는 것은 이사야의 약속(사35:5)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서 예수가 친히 "소경이 보며……귀머거리가 듣는"것을 메시야 도래의 표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고로 귀머거리가 고침받고 장님이 고침 받는 것은 결국 예수의 "메시야적 행동" 이며 구약예언의 성취를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마가의 의도적 편집에 관심을 가진 리차드슨(A. Richardson)은 이 두 개의 이적 기사가 "예수의 주 되심에 대한 무의식적 증거"라고 말함으로서, 이것이 사실상 마가의 의도적인 편집이라기 보다는 예수의 생애에 나타난 사실이 갖는 신적 의도임을 그도 역시 무의식중에 반영하고 말았다. 즉 예수가 처음부터 신적의도를 가지고 이러한 일련의 평행적 행동이나 이적들을 베푸었기 때문에 신약복음의 저자들도 무의식 가운데 그것을 기록하게 되었다는 말인데 이는 일련의 이적 행위들을 통하여 유대인을 통하여 이방인으로 나아가는 이방선교의 계획과 뜻을 나타내 보이고저 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에수의 선교의지와는 반대로 무지로 일관되어지는 제자들의 모습은 또한 일관되게 사람을 사랑하시고 섬기시는 주님의 사역과 깊은 대조를 이룬다(막11:17, 12:9). 마가가 그의 복음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제자들의 불신과 몰이해 그리고 배반과 배척으로 이어져 결국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고난 받는 메시야상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인데 제자들의 행태가 이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기적과 기사들을 통하여 에수께서 세상을 자유케하는 메시야 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2)마가복음의 인종적 관심
(1)제자들의 무지와 오해
우리는 앞서 마가복음의 첫 번째 단락(1:14-8:26)에서 제자들이 예수의 이적적 사역들을 이해하는데 실패하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그들 제자들의 실수는 첫째, 그들은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고(4:10-13), 둘째, 그들을 구원하신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며(4:38-41), 그리고 바다위로 걸어오신 예수를 보고 놀라서 떨었던 것이다(6:51-52). 더더구나 두 번에 걸쳐 베푸신 급식의 이적(6:35-44, 8:1-9)속에 있는 선교적 의도는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선교적 사명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가복음의 둘째 부분(8:27-45)에서, 제자들의 무지가 빚어내는 궁극적인 결과 즉 예수가 배척 당하고 수난당하는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제자중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것 같지만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예수의 죽음을 반대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책망을 받는다(8:31-33). 계속해서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의 길을 나타내셨고(8:31-32, 9:31-32, 10:32-34), 하늘의 음성이 "저의 말을 들으라"(9:7)고 했음에도 제자들은 깨닫지도(9:32) 수용하지도 못했다(8:32). 제자들은 오히려 서로 누가 더 높으냐고 다투고(9:33-37) 있는 모습을 보였다.
마가복음의 후반부(10:46-16:8)에서 또 하나의 평행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십자가를 끝까지 거부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가는 그것이다. 겟세마네에서 잠을 자는 제자들의 모습은 십자가를 거부하는 제자들의 무지와 오해(14:37)의 단면을 볼 수 있고 유다의 배신, 베드로의 부인 그리고 매장 때에도 나타나지 않는 나약함과 배신등에서 극단적으로 배신당한 메시야의 모습을 읽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진"(15:21) 사건 은 너무나도 대비되는 사건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방인 시몬의 십자가 진 사건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8:34)고 하신 말씀의 성취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유대인과 제잗르이 거부한 십자가이기 때문에 이 십자가의 가벼운 짐은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역사적 당위성과 이방 선교의 당위성을 제공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2)이방인 백부장
예수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되는 구원의 축복은 모두 다 구약의 예언으로부터 예고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인자(Son of Man) 사상은 예ㅛ수의 메시야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하나님의 목적은 예수를 통하여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인데, 이러한 예수의 구원자적 사역을 함춗적으로 나타내는 단어가 "인자" 인 것이다. 예수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하신 말씀속에 함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물론 이말씀의 배경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임을 알 수 있다. 또 그것은 그가 자기 목숨을 희생제물로 내어 놓음으로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렘31:31).
그런데 이러한 신앙고백을 유대인과 제자들이 하지 못하고 십자에 달린 예수가 바로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14:61,62)이시라고 선언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예수를 처형하는 로마사람 백부장이었다. 그는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라고 고백한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열려진 구원의 길에 들어선 최초의 신앙인이요 이방인으로 기록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주님은 처음에 유대인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러나 그의 사역이 완성되는 순간에 그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그 신앙의 길로 찿아온 사람은 유대인이나 제자가 아닌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이 고백과 함께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새롭고 산 길이 열렸다. 이것은 온 세상 만민에게 그 길이 열렸음을 상징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마지막 장면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고 명령하시는 부활의 주님의 모습이다.

2.마태복음

마태는 상당부분 마가의 기록을 이용하여 기록했다. 마태는 예수님 사역을 돌이켜봄에 있어서, 그를 위대한 전달자, 즉 새로운 모세로서 심중에 확신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모세보다 훨씬 넓고 훨씬 놀라운 범위에의 전달자로 생각하고 있었다(24:14). 마태는 모세를 유대나라의 실질적인 설립자로 생각하고 있는 자기 동족들의 전통에 깊이 몰두했다. 그래서 산상수훈이 그 어느 복음서보다 체계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5,6,7장)
이러한 맥락에서 마태복음은 구약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선교적 임무를 재확인시켜준다.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에게 위임된 하나님의 제사장 국가로서 열방앞에 보여주어야 할 것임을 산상수훈이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한다고 김연진은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계속적으로 국경을 넘어서 그의 왕국을 선포한다.(4:17-25) 이제 제자들도 국경을 넘을 준비가 되어있기 위하여 훈련을 받는다.(9:9-17; 20:18-20)
 
1)유대적 경향
마태복음은 이상스럽게도 "가장 유대적인 복음서"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이방적인 편향성"을 가진 "친(親) 이방적 복음서"의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예수가 열 두 제자를 파송하면서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10:6)고 한 명령에서 강한 유대적 민족주의(the Jewish particularism) 혹은 배타주의를 볼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이방선교를 명령하는(마 28:18~20) 세계주의의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양자의 긴장과 갈등이 오히려 예수의 선교를 더 잘 설명해 주고 있다.
(1)유대적 배타주의(the Jewish particularism)
복음서들 중에서 마태복음이 가장 유대적이라고 하는 사실은 널리 인정되어온 일이다. 실제로 이러한 주장을 옹호하는 몇가지의 특징들이 이야기되어 왔다.
첫째로, 베이컨(B. W. Bacon)의 주장은 마태복음이 모세오경의 패턴에 따라 오경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개종한 랍비이며 기독교 율법주의자였던 마태가 그 당시 기독교회가 율법 폐기론자들(antinomians)에 의해 위협당하고 있을 때, 예수의 계명들을 모세오경의 패턴에 따라 다섯권으로 묶어 제시함으로서 그에 대처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독특한 공식적 인용문구가 있는데, 하나는 "이에 선지자로 말씀하시 바가 이루어 졌느니라"(2:17)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모든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1:22)하는 것이다. 이같은 공식적인 인용문구는 예수가 구약에서 선포되었던 메시야라는 점과 예수에 관한 모든 사건이 구약예언의 완성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특히 유대인 독자를 염두에 든 까닭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셋째로는 엘리스(Peter F. Ellis)가 말한 것처럼 마태복음은 "복음서의 전반에 걸친 유대적 어조"(the over-all Jewish tone of the Gospel)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조되는 문제는 유대적 민족주의 또는 배타주의(the Jewish particylarism)가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앞서 마라하였듯이 예수가 열두 제자들을 사도(使道)로 택한 후에 그들을 파송하면서, 그들에게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차라리 이수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10 : 5, 6 )고 명령한다. 더구나 예수는 도움을 요청하는 가나안 여인을 향해서 "나는 이스라엘 짐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15 : 24 )고 말함으로써 이방인에 대한 도움을 단호하게 배격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예수와 그 제자들의 선교활동은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것처럼 생각된다. 더구나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7 : 6 )고 하는 명령을 같은 맥락에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개와" "돼지"가 흔히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전도를 금지하는 명령으로 해석한다.
마태복음 15 : 24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는 구절은 어떤 진술인가?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여인에게 이스라엘 "집"을 말씀하신 것은 그가 구약성경의 선택교리에 따라 세상만국과 이스라엘을 확연하게 구별하고 계셨다는 사실에 또 하나의 증거를 보태어 주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포도원, 하나님의 양무리(마 10 : 6)이며, 하나님의 약속들은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유효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것이다(마 8 :12, 관련; 눅 12 : 32). 이에 반하여 이방인들(만국)은 구약성경에서 처럼 어두운 색조로 그려져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 기도할 때 중언부언 함으로써 저희 무지를 가리려 하여(마 6 : 7), 그들은 오직 세상 것만 찾으며(마 6 : 32, 관련; 눅 12 : 30), 하나님과 메시야를 거스리는 일만 한다(마 10 : 33, 관련 눅 21 :24, 참조; 행 4 :27).
에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 : 5 - 6)고 말씀 하셨다. 유대인들의 선교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멸망케 하는 것이라고 판정하셨다(마 23 : 15). 예수께서 이스라엘 밖에서 병을 고치시며 전도하셨다는 사실이 이런 성귀들의 비중과 예리함을 약화 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 자신이 이방인에게 선교하기 위하여 노력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5 : 21 - 28, 8 : 5 - 13의 병 고침은 멀리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대나라의 국경을 넘으신 것은 이방인에게로 나아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전 유대인 지역 안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마태복음안에서 보여지는 것은 어떤 연유인가? 이 사건들을 마태의 시각이 예수와 같이 민족주의나 "배타주의"탓인가?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오늘날엔 거의 완전히 포기되었다. 이 모든 것을 예수께서 자신의"계시의 역사적 맥락"안에 두시려는 하나의 표시로 인식된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중론이다. 이 역사적 맥락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에 완전히 이루어지는 끝날에 이방인들도 구원에 참여케 됨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구원의 때가 임박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이 구원을 그 자신의 메시야적 사명과 관련 시키셨다. 이것은 복음서들에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마태복음서 안에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보여진다. 최후의 심판때에 이스라엘과 함께 세상 만국도 하나님앞에 설 것이며, 이방인들과 이스라엘은 함께 세상 만국도 하나님앞에 설 것이며, 이방인들과 이스라엘은 마찬가지로 구원을 받기도 하고 멸망을 받기도 할 것이다(마 25 : 31 ff). 또한 끝날에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교제하게 될 것이며(마 8 : 11, 12 : 42 ff), 이스라엘에 속했다는 사실 하나로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없다(마 3 : 9) 그와는 반대로 이스라엘과 만국간의 차이는 없어질 것이며( 마 23 : 37), 이스라엘은 오히려 이방인보다 더욱 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입장이 될 것이다.( 마 12 : 4f)
(2)이방에 대한 개방성
마태복음의 특징은 고립된 유대주의적 사고를 벗어나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복음을 전해야할 대상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한 예로 마태복음 10장과 28장은 유대인과 비 유대인에 대한 선교를 조화있게 묘사하고 있다. 곧 선교의 지역이 온 세계로 확장되었음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비유들과 그 설명은 교회의 선교와 관련해서 일어나게 될일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비유들은 마지막 때가 되기전에 온 민족이 복음을 듣게될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다(24:14). 아울러 종말적 심판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을 것을 예고해 준다. 곧 선교사역은 이 땅의 모든 민족과 국가들에게 행해져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5 : 24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는 구절은 어떤 진술인가?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여인에게 이스라엘 "집"을 말씀하신 것은 그가 구약성경의 선택교리에 따라 세상만국과 이스라엘을 확연하게 구별하고 계셨다는 사실에 또 하나의 증거를 보태어 주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포도원, 하나님의 양무리(마 10 : 6)이며, 하나님의 약속들은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유효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것이다(마 8 :12, 관련; 눅 12 : 32). 이에 반하여 이방인들(만국)은 구약성경에서 처럼 어두운 색조로 그려져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 기도할 때 중언부언 함으로써 저희 무지를 가리려 하여(마 6 : 7), 그들은 오직 세상 것만 찾으며(마 6 : 32, 관련; 눅 12 : 30), 하나님과 메시야를 거스리는 일만 한다(마 10 : 33, 관련 눅 21 :24, 참조; 행 4 :27).
마태복음의 주요한 면은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책이 유대인들이나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외 다른 복음서보다 많은 구약성경인용에서 찾을 수있다. 즉 자신의 주장을 변호하기 위해서 구약의 증거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있다. 여기에는 구약의 직접인용과 암시가 100회이상 사용되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또는 "선지자로 예언된바"와 같은 구절이 마치 후렴구처럼 반복된다. 예수의 생애의 각장면마다 마태는 한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구약의 본문과 예수의 사역으로 성취된 구약의 예언들을 제시한다.
마태는 1장에서부터 예수를 다윗의 자손임을 족보로서 증명해낸다. 그러므로 예수는 틀림없는 유대인의 왕인 것이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며, 히브리인에게 약속된 메시야로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시라는 것이 마태의 위대한 신학적 주제이다. 그러나 그 예수는 자기 백성에게 배척을 받고 유대인의 왕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히시었다. 마태복음을 읽는 사람은 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이가 십자가에 못박히시었는가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예수는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그의 제자들에게 보이시며 40일간 함께 계시므로 오히려 그의 고난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하나님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의 상당수가 마태복음 저작자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스탠튼(G. Stanton), 클라크(K. W. Clak), 네퍼크리스텐센(P. Nepper-Christensen), 그리고 스트레크(G. Strecker)등이 이러한 주장을 한다. 이들은 마태가 유대사회의 관습에 현저하게 무지한 것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하는 24장14절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방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마태복음의 사상이 새 이스라엘에 포함됨으로 구ㅜ언받을 수 있다는 바울의 사상과는 달리 오히려 주로 이방인으로 구것된 기독교가 유대교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를 뒷받침하는 구절로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쫒겨나 울며 이를 감이 있으리라"(8:12)와 "하나님의나라를 너희는 빼았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21:43)를 내세우고 있다. 이들의 주장처럼 마태복음안에는 이러한 주제가 상당히 빈번하게 나온다. 비유들을 통하여서는 이러한 주제가 확증되는 듯하다. 유대백성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면 누가 하나님의 참 백성인가? 두 아들의 비유(21:28-32), 악한 농부의 비유(21:33-43), 혼인잔치의 비유(22:1-14), 열 처녀 비유(25:14-30), 그리고 최후 심판의 비유(25:31-46)등을 보면 도가 지나칠 정도의 유대인 공격성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황들로 미루어 마태복음의 저자가 유대인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러한 특징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의도가 있는가? 이것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a.족보
마태복음의 서두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족보가 가지는 상징성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짖는 중요한 인물이다. 예수 역시 이 사람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많은 사람이 동서로부터 이르러 아브라함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않으려니와"(8:11). 이 말씀은 결국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으로서 유대인의 시조가 되지만 또한 그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창12장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것이기도하다. 이 때문에 마테복음의 기자는 아브람을 언급함으로서 예수가 모든 이방인들의 소망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언급된 네명의 여인중 세명은 이방인이었으며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도 우리야가 헷사람(삼하11:3) 이었기 때문에 이방인일수밖에 없는 여인으로 족보에 올있는 것인데 이것이 메시야의 탄생이 유대인에게만 국한 된 것 아니라 모든 이방민족에게 열려진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b.이방의 구원
마태복음에 기록된 재미있는 또다른 공통점은 이방인들중에서 나타나는 믿음이다. "동방 박사"(2:2-8)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8:10)는 칭찬을 얻게 된다. 가장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는 이방인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c.비유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21:33-46)가 나오는 마태복음의 이 비유에 대해 슈바이처(E. Schwizer)는 "이스라엘이 예수를 배척한 것에 대한 비유"라고 했다. 알레고리로 이해하면 포도원농부는 이스라엘을 , 주인이 보낸 종들은 예언자들을, 아들은 예수 자신을 , 그리고 다른 농부는 다른 백성 곧 이방인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주체가 이스라엘에서 이방인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여주는 비유라고 할 수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마가와 누가에게도 비슷한 비유가 있지만 마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은 백성이 받으리라"(21:43)는 경고를 비유속에 확실히 기록한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또 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20:1-16)는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될 것이다"(20:16)라는 말씀을 선명하게 삽입 시켜 놓음으로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흘러 갈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에만 소개 되어 있는 이 비유속에서 마태복음은 이방인 개방성에 대하여 확연히 알 수 있다.
 
(3)두 선교명령의 대치
그런데 마태복음안에는 예수의 선교 명령이 두 번 나온다. 10장5,6절의 사역 초기의 선교명령과, 28:19,20절의 마지막 위임이 그것이다. 이 두 명령은 초기의 것은 제한적인데 반해 뒤의 것은 포괄적 명령이라는 것 때문에 갈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명령의 대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첫째, 초기의 제한적 선교 명령은 열 두 제자의 파송이라는 전체맥락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열 두 제자의 파송에 관한 기사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또한 각각의 관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첫번째 부분(10:5-15)은 가릴리에서의 사역을 코 앞에 두고 내려진 명려이며, 두 번째 부분(10:15-23)은 예수의 부활과 성령강림이후에 제자들이 실제로 감당해야할 사역에 대하여 명령하고 있가 때문에 이방인을 포함한 명령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5절에서 이방인이 제외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선교명령에 모순이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옳지않다.
이러한 선교정책의 변화는 처음부터 유대인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요 유대인들이 복음을 배척했을 때 일어날 것이었기 때문에 갈릴리의 사역에서는 먼저 제한적으로 그 명령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전세계적인 선교명령을 내린 승천 직전의 선교명령을 살펴보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28:19-20)는 말씀중에 강조 되고 있는 것은 "모든 족속"( )은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24:14)에서 쓰인 단어와 또한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 )이 받으리라"(21:43)에서 쓰인 "이방 백성"을 지칭하는 단어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결국 아브라함의 족보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이방 모든 백성에게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명령하는 세계주의적 선교관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3.누가복음

누가복음 24 : 44-53에서는 패배로부터 승리를 거두고, 슬픔을 기쁨으로 변하게 하시며, 죄와 허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하여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시는 놀라는 하나님의 활동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용서하는 권세"를 강조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헬라인 의사였던 누가는 데오빌로라는 로마의 고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이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이 복음서는 초신자들을 지성적인 신앙인이 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기록하였다고 보여진다. 예수의 흔적을 보다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수의 계보로부터 탄생과 사역과 수난을 거쳐 부활에 이르기 까지의 사실을 연대기적 기법으로 서술하고 있다.
 
1)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 됨
누가복음의 핵심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삭개오에게 하신 말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 : 10)에서 찾을 수있다. 앞에서도 살펴 본대로 누가복음도 인자사상이 드러나고 있다. 인간을 죄에서 끌어올려 생명과 희망으로 인도하는 예수의 사역과 교훈에 초점이 모아진다. 예수의 기저과 비유와 교훈, 그리고 주의 모든 행적은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과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것이다. 예수님을 인자됨은 인간을 향한 주(主 )의 연민과 인간미가 강조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 : 32). 누가는 자신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복음서의 다른 어떤 기자들 보다도 이방의 선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오직 누가복음에만 소외된 사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감동적인 비유가 나오는 것이다. 또 문간에 않아 구걸하던 거지를 천대하다가 음부에 떨어져서, 뒤늦은 회개에도 불구하고 고통에 심음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도 오직 누가만이 전해주는 이야기이다. 이는 예수가 민족과 계급을 초월한 유일한 구주이심을 알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짐작케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사도행전과 같이 동일한 사람의 작품이다. 이 두성경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한 선교적 위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선교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누가는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또한 그 시대에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져야 할 것을 강조하고 따라서 "죄 사함을 얻게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족속에게 전파" 되는 일이 시급함을 전한다(24:47) 보쉬(David J. Bosch)는 용서와 결속이 누가복음의 선교모델의 핵심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누가의 선교신학의 특징을 여덟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에 대해 김연진은 몇가지로 요약해서 우리에게 전해준다. 첫째, 누가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다. 성령은 곧 선교의 영이시라는 것이다.
둘째, 누가는 선교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상호 협력하므로 열매맺게 됨을 강조한다. 셋째, 누가는 선교에 있어서 증인됨을 강조한다. 선교는 증언이며 선교사는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들이다. 누가는 때때로 증인과 '사도'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행1:2. 8; 10:41) 이상에서 본 것을 종합하면 선교는 곧 교회의 사역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교회가 이 사역을 수행해 나갈 때 핍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눅 9:51-19:40). 이러한 증거들은 선교가 곧 영적인 전투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있을 것이다.
2)선교의 연속성
누가가 처은 기록한 누가복음은 사도행전과 함께 구원의,연속성을 가지고 기록 되었다고 보여진다.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가 세례 요한 까지라면 "구약-예수-사도들"로 이어지는 선교사역의 연속성도 그 지리적 진행과 함께 발견된다.
그러므로 제1권인 누가복음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그리고 제2권인 사도행전을 "로마로 가는 길"로 부른다면 선교사역의 연결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헹겔(M. Hengel)은 사도행전을 "예수로부터 바울까지" 라고 부르며, 캐드버리는(H. Cadbury)는 "사도행전이 예수가 바울을 , 그리스도 그리스도교를 , 예수의 복음과 예수에 관한 복음을 이어주는 교량이다"라고 말한다.
이와같은 동일성과 연속성이 누가문서의 특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속에서 우리는 누가복음속에서 선교사상을 찾아낼 수 있다.
(1)세례 요한과 예수의 연속
누가복음 서두에서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탄생기사가 평행구조로 나타난다. 즉 1장 5-7절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부모가 쇄되고 있고, 1장26절에서 27절에서는 예수의 부모가 소상히 소새되고 있다. 또 1장8-11절에서는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는 것과, 1장28절에서는 천사가 마리아 에게 나타나고 있다. 1장12절에서는 사가랴거 천사를 보고 놀라고, 1장29절에서는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듣고 놀란다.
1장 13-17절에서 사가랴를 향한 천사의 음성은"두려워하지 말라......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했고, 1장30-33절에서 마리아에게 는 "두려워하지말라....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하라"고 말했다. 또 1장 18절에서 사가랴는 의심하면서, "나는 늙은 사람이요 내 아내가 나이가 많으니 어떻게 믿겠습니까?라고 말하는 데, 1장 34절에서는 마리아 역시 의심하면서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1장57절에는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라고 기록되엇고, 2장 6-7절은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라고 기록하였다.
1장 59-64절에 보면 아이가 팔일이 되던 날 할례를 받고 천사의 지시대로 요한이라고 불리웠으며, 2장 21절에 보면 아이가 팔일이 되던 날 할례를 받고 천사가 지시한 대로 예수라고 불리웠다고 기록했다.
이외에도 많은 유사한 평행구절이 나온다. 이러한 이유는 누가의 지배적 관심이 구원의 드라마에서 나타나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간의 연속성이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눅16:16)라면, 세레자 요한과 예수의 대비는 결국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강조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예수와 베드로의 연속성
누가문서의 연속성은 예수와 사도의 대표자로 대별되는 베드로와의 유사성 대비에서도 나타난다. 즉 이것은 뒤에가서 예수의 선교의 사명을 이어받는 베드로로 연결된다.
첫째로 예수가 공생애 활동에 들어가기전에 요단강에서 섀ㅔ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그 때 그에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다(3:21), 제자들은 예수의 승천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 했는데 그 때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행2:1-4)
둘째로 예수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한 나사렛 회당의 설교에서 구약예언의 성취를 선포하였는데(4:16-21), 베드로 역시 예언이 나사렛 예수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그의 선교적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행2:14-22)
셋째로 예수는 말씀으로 중풍병자를 고쳐주었는데,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성전미문에 않았는 않은뱅이를 고쳐 주었다.(눅5:17, 행3:1-10)
넷째로 예수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논젱을 벌이는데 베드로도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인다.(눅5:29-6:11, 행4:1-8:3)
다섯째 유대인의 칭송을 받는 한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기의 병든 종을 고쳐주기를 간청하였으로 예수가 그의 종을 구원해 주었는데(눅7:1-10), 사도행전에서는 유대백성의 칭송을 듣는 한 이방인 백부장(고넬료)이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고 베드로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그의 식구들까지 구원해 주었다.(행10장)
그외에도 나인성과부의 아들과 욥바의 과부 다비다(눅7:11-17, 행9:36-43), 이야기드이 평행구조를 통하여 드러난다. 이것은 예수의 사역이 그의 제자 베드로에 의해 승천후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는 누가의 관점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3)예수와 바울의 대비
이제 누가의 관점은 예수와 바울을 대비함으로 선교사역의 게승과 확장을 선명하게 해준다.
첫째, 예수의 바울의 공통점은 둘다 모두 이방선교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것이다. 7인전도대를 택하여 파송하는 누가복음 10장의 기사는 이방선교를 예고하는 예수의 사역이며 바울은 그의 전 생애를 이방선교를 위해 헌신하며 여행하였다.
둘째, 예수와 바울이 선교의, 근거로서 제시하는 구약의 본문이 동일하게 이사야 6장에서 인용되고 있다. 이것은 이사야가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진 사실을 반복적으로 언급함 으로서 그들의 선교사역을 통햐여 그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로 이방인에게로돌아서는 선교사역이 진행됨을 밝혀주고 있다. 예수와 바울은 모든전도 활동 초기부터 그들의 백성인 유대인으로부터 배척당했다. 그런데 이러한 배척이 결국 기독교가 세계종교가 되는 전환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행28:28) 이상과 같이 예수 이후의 베드로와 바울의 선교가 예수 생애의 사역과 너무나도 유사하다는 것을 누가가 알리고자 함으로서 이는 이방선교가 예수의 의도적인 훈련에 의하여 계승된 것임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3)예수의 기도에 나타난 선교사상
누가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하는 장면이 여러곳에서 나타난다(눅5:16, 6:12, 9:28, 11:1등). 예수께서 물러가사(9:10에도 나온다)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신 이유는, 15절에 보면 사람들이 모여왔기 때문이다. 즉 군중은 계속해서 몰려오고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물러가고 계셨다는 미완료형 계속동작을 나타낸다. 이처럼 기도하시러 가는 예수를 자주 나타내는 것은 누가복음의 특징이다. 이러한 누가의 관점은 이후 사도행전에서도 이어지는데 사도행전의 1:8절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도는 성령의 역사를 구하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는 제자들을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취급되어 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로 칭하였으니"(눅6:12) 예수께서 사도들을 택하신 이유도 결국엔 선교를 위함 이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기도의 절정은 누가복음 22장41절 이후에서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겟세마네의 기도였다. 그 기도는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져야 하는 십자가를 감당케 해달라는 기도였고, 결국 이로 말미암아 구속의 큰 일을 이루시게 되고 부활 후 승천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저 유명한 당부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24:49) 하셨고, 이 당부에 따라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전혀 힘썼다(행2:1). 그 결과 성령이 강림하시고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예수의 증인으로 복음을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기도가 가지고 있는 선교적 의의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것은 결국 선교를 그 마음에 두시고 이 땅에서 그 사역을 감당하신 예수의 선교적 의도를 읽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공관복음의 비유들을 통해 나타난 선교사상
 
1) 씨 뿌리는 비유 ( 마 13:11, 막 4:11, 눅 8:10 )
이 비유는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 비유이다. 또한 이 비유가 가지는 중요성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면 능히 다른 비유도 깨달을 수 없는 가장 기초적인 비유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가 기록된 뒤에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묻는 제자들에게 비유를 통하여 은밀히 숨어있는하나님 나라 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사람만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공관복음 모두는 기록하고 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무엇인가 ? 대부분의 경우 이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4가지의 밭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예레미아스는이 비유의 핵심은 헛수고로 보이는 씨 뿌리는 자의 행위가 마지막에 ( 종말론적으로 )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는 하나님의 충만을 암시하는 것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고 말하면서 이와같은 하나님의 충만은 사람들의 이해를 넘어서서 다가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윌리암 레인 ( William Lain )도 예레미아스의 견해에 찬동을 표하면서이 비유의 핵심은 4가지의 토양이 아니라 농부의 파종 행위에 있다."고 말한다. 이는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하나님 나라 가 이 세상의 현장에 돌입하여 왔다는 것을 알려주며 또한 하나님의 충만으로 결실할 때가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하나님 나라 는 사람의 힘에 의하여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 하시어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중심적 관심사는 하나님께서 행동 하신다는 것에 있다. 이 비유의 시작은....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 마 13:3-4 )이다. 씨를 뿌리는 자의 행위가 그 어떤 것에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자신의 행동을 행하고 있다. 유대인들은하나님 나라 의 도래는 엄청난 큰 재난 후에 강압적으로 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와같이 전하는 예수님의하나님 나라도래를 용납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이 바로 씨를 뿌리는 농부의 행위인 것이다. 이 비유에서 나타나는하나님 나라 의 본질은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시행 된다는 것이다.
 
2)겨자씨 비유( 마 13:31, 막 4:30, 눅 13:18 )와 누룩의 비유( 마 13:33, 눅 13:20 ) 이 두 비유는 우리에게 같은 근본 진리를 전해주고 있다. 천국은 마치 ... 겨자씨 한 알 같으니 .... 천국은 마치 ... 누룩과 같으니라. 스테인( Stein )은 이 비유들에 대하여서 구약적 개념으로 성장의 비유를 보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헤겔의 철학적 사고로 보면 이 비유는하나님 나라 의 진화론적 발달로 해석되기 때문이다.하나님 나라 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 까지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확산 되어야 하는 것이 서구의 사상으로는 타당한 것 같으나 이 세계가 경험한 여러가지 전쟁들과 불일치, 부조화 등은하나님 나라 의 진화론적 발달과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유는 오히려 동양적 사고에서 이해 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 비유의 촛점은 처음과 나중의 대비이다. 미비한 출발에 비하여 결과는 엄청나다.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큰 영광후의하나님 나라 의 도래와는 차이가 심하다. 미비하게 도래하여 세리와 창기, 가난한 자, 눈 먼 자에게 있는하나님 나라 를 유대인들은 볼 수 없었다.
 
3)밀과 가라지 비유.( 마 13:24 )
이 비유는 불현듯 다가오는하나님 나라 를 잘 설명하고 있다.....천국은 ...뿌린 사람과 같으니 ....한때 이 비유는 촛점을 벗어나 추수하는 밭이 세상인가 ? 아니면 교회인가 ? 하는 해석으로 많은 논쟁이 있었으나 대부분은 세상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 비유는 두 가지의 씨앗과 성장이 하나의 밭에 있는 것과 후에는 이것이 분리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분리를 몹시 갈망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로마의 멸망은 열심당원에게는 분리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천국 선포는 이와같은 분리가 없이하나님 나라 가 임하였다 하는 것이기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비난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심판이 이미 이 세상 가운데 임하였다. 그 심판은 마지막 날에 확연한 분리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 분리는 추수꾼들의 할 일이다. 하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하나님 나라 가 이 세상에 도래 하였으나 인간의 세계는 아직 와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분리는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며 현재에 임한하나님 나라 는 미래에는 영광 가운데 밝히 드러날 것이다.
 
4)그물비유. ( 마 13:47 )
이 비유의 촛점은 그물 안에 있는 물고기의 종류와 후에 가려내는 행위에 촛점을 두어야 한다. 또 천국은 ...그물과 같으니 ....옛날의 주석가들은 이 그물을 교회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선인과 악인을 함께 있게 하시지만 종말에 가서 가려내시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당시에 교회라는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에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비유에서 이와같은 의미를 가지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적합하지가 않다. 이 비유는 앞서 살펴 본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비슷하나 한 가지의 요소를 더 가지고 있다. 그것은 종말론적 심판이 있기까지는 이 사회안에 악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그물이 드리워 졌으나 물고기들이 그물안에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하나님 나라 도 예기치 못하게 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5)감추인 보화와 귀한 진주의 비유.( 마 13:44, 45 )
이 두 비유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비유이다. 이 비유들 가운데 나타나는하나님 나라 의 본질은 그 어떤 것 보다 먼저 소유햐야 하는 귀중함을 알려주고 있다. 천국은 ...보화와 같으니 .... 천국은 ... 장사와 같으니 ....이 비유에 대하여 예레미아스는 기뻐서 행하는 헌신에 촛점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모든 것을 팔아 밭과 진주를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기뻤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한편, 미헬리스는 발견에 중요점을 두고 잇다. 예상치 못하던 때에 귀한 것이 제공 되었기에 모든 것을 팔아 를 강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도드 ( C. H. Dodd )는 이 비유를 해석하기를 예수는 자신의 사역 가운데서하나님 나라 의 도래를 보았다. 이 근본적인 진리를 마음에 새긴다면, 천국은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며, 또한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리는나를 따르라 는 소리에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나 진주 장사같이 귀를 기울인다면 당신은 즉각적으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비유에서는하나님 나라 의 현재성이나 미래성이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 오히려 천국 을 소유하는 사람들이 행한 행동의 결과를 말하고 있는 비유이다.
이러한 헌신이나 구도자에 대한 비유의 가르침은 결국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는 선교사들에게 크나큰 용기를 준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교사역을 위하여 헌신된 선교사를 준비시키시고 또한 필요한 마음의 소원을 선교사의 마음속에 일으키신다고 믿게끔 한다. 또한 선교지에 나갈 때 개종자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제거해 준다. 왜냐하면 어디에든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은 준비해 두신 구도자가 있기때문이다.
 
6)포도원 농부의 비유 ( 마 20:1 )
왜 포도원 주인은 하루에 몇 차례씩 사람을 구하러 갔는가에 촛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포도원에 시급한 일이 발생하였다고 이야기를 하나 이 비유의 핵심은 끝 부분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천국은 마치 ...집 주인과 같으니 ....스테인에게 있어서 이 비유는 예수님 당시의 상황과 분리 시켜서 해석하는 것은 타당치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스테인은 주인의 처사에 대하여 불평을 하고 있는 처음 포도원에 온 농부들과 주인과의 관계가 비유의 촛점으로 여기며, 여기서 불평하는 농부들을 유대인으로 보아 가난한 자들에게 그리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희생 당하시는 예수님을 반대하고 있는 모습을 비유로 말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또 예레미아스는 예수님의 이 비유는 자신들의 지식이나 권위를 앞세워 사랑이 없으며 무자비하게 이웃을 비난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그들의 상태를 지적해 주시려는 예수님의 의도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고 있다. 끝 부분의 선언인 나중된 자가 처음되고 처음된 자가 나중된다. 는 바로 예수님 시대에 살고 있었던 자들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하나님 나라가 버림받았다고 생각되는사람들에게 도래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비유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선교적 사명을 깨닫지 못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으며 결국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하고 거듭되는 국가적 시련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안에 들어오지 못한 삶들에 대한 주님의 자비로우심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선교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이방세계에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이러한 선교적 명령에 자유로울수 없는 것이다.

Ⅳ. 선교의 선구자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당시에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던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는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에로의 초청이었으며 선포는 종말론적인 메시지였다. 그 당시에 유행하던 묵시문학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설교의 주된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확장하러 오셨다는 것은 이 세상이 현재 마귀의 권세가 있는 세상나라로서 선교의 대상이 되는 곡임을 전제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그 것을 확장하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은 결국 선교하셨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의 많은 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었다. 결국 그런면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선교사요 선교의 개척자라고 할 수있을 것이다.
 
1. 선교의 주제와 원리

 누가복음에는 시므온의 유명한 찬양의 시, 예수를 "이방을 비추는 빛"(눅 2:32)이라 하였다. 또 마태는 구약성경의 에언들을 기억하고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않을 것이라"(마 8:11)고 예수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마태복음 26:11에서는 베다니의 마르다가 예수님께 기름을 부었을 때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신 말씀도 전해준다. 공관복음서의 기록들은 예수께서 메시아로서의 자의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선교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당초에 예수는 유대인으로서 유대 백성들에게 오셨다. 그는 구약의 권위를 인정했으며 성전규례들을 준수하였고, 회당예배에 참석하였으며 평생 유대인으로 살았다. 그의 공생애가 주로 "이방땅 갈리리"(마4:15)를 무대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역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마15:24)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이스라엘에서만 전파하도록 명령함으로서(마10:5,6). 그들의 사역이 이방인의 길로 나가지 않도록 지조하였다. 예수의 사역은 구약의 언약과 예언자들의 약속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는 언약과 약속을 전수받은 이스라엘을 "나라의 본 자손"(마8:12)로 인정하였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먼저 전도하라는 명령은 계약신학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오며 (요4:22)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다.(롬1:16, 2:9, 3:9, 26 ; 행13:5, 20:21). 구원의 축복도 먼저 유대인에게요 다음은 이방인이며, 아울러 책임을 다하지 못한데 대한 심판도 먼저 유대인에게요 다음은 이방인이다. 예수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지금 그의 약속을 성취하고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려 놓기 위해서 행동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나사렛에서 거절당한 경험을 조심스럽게 그의 복음서 초두에 둠으로써(눅 4:16∼30, 막 6:1∼6 참조), 메시야적 성취와 이스라엘의 거절이 예수의 사역 초기에 있었다고 알려준다. 마가는 갈등과 거절의 경험을 처음부터 서술하는데, 그는 예측했던 예수의 사역의 종말이 급......


Scrap: 쉴만한 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