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위기에 강한 일본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으로 전 세계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영국에서 폭동까지 발생하는 등 세상이 뒤숭숭하다. 그런데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지난 24일 일본의 신용등급을 한 단계 내렸지만, 엔화는 오히려 강세를 보이는 등 별다른 영향이 없었다. 세계 경제위기에도 요즘 일본은 평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쓰나미와 원전사고로 우울하던 일본인 중 상당수가 '엔고(円高)'로 오랜만에 웃음 짓고 있다. 공항은 엔고를 활용, 외국관광을 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해외여행이 일본 국내여행보다 훨씬 싸다. 상점가에서는 '엔고 세일'이 한창이다. 엔고 덕분에 수입제품 가격이 최고 절반까지 내렸다. 주가 폭락도 남의 일이다. 일본도 주가가 폭락했지만, 개인자산 중 주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6%에 불과하다.

일본은 희한하게도 글로벌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어김없이 엔화 가치가 치솟는다. 세계 각국이 평상시에는 일본을 조롱하면서도 위기 때는 '역시 일본'이라는 식으로 돌변한다. 신용평가회사들이 국가부채가 GDP의 200%가 넘는 선진국 최악의 재정적자국이라며 일본의 신용등급을 낮췄지만, 지금 일본이 미국이나 영국보다 더 위기라고 보는 전문가는 없다. 정치의 무능이 초래한 장기침체를 의미하는 '재패니피케이션'(Japanification·일본화)이라는 신조어가 유행이지만 정작 일본의 현실은 정반대이다.

글로벌 위기 때만 되면 엔이 안전자산으로 급부상하며 엔화 가치가 치솟는 역설(逆說)이 되풀이되는 이유는 뭘까. 우선 '저축의 힘'이다. 1400조엔이 넘는 가계금융자산 등 일본 국내 자금이 국채의 95%를 소유하고 있다. 외국자본이 국채를 팔면 요동치는 부채대국 미국과 정반대로, 일본은 해외에 돈을 빌려주는 채권대국이다. 고령자 증가로 인해 평균저축률이 급락했다고 하지만, 30~40대의 저축률은 오히려 상승추세이다.

게다가 제조업은 여전히 강력하다. 아이폰과 같은 세계적인 히트상품은 없지만, 일본 기업들은 그 부품을 생산하고 있다. '아이폰 4'에 대해 부품 제조국별 부가가치 비율을 평가한 결과 일본이 34%로 1위를 차지했다. 세계시장을 독과점하는 부품업체들이 많다 보니 대지진으로 공장가동을 중단하자 해외업체들이 아우성을 쳤다. 일본 재계는 엔고로 제조업체들이 해외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아우성이다. 일본 정부도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겠다"며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하지만 수출이 일본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6%에 불과한 데다, 장기간 디플레로 인한 임금 하락 등을 감안하면 '엔고=제조업 몰락론'은 엄살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엔고가 오히려 해외 기업들을 싼 가격에 인수, 경쟁력을 높일 기회라는 것이다.

1년에 한 번씩 총리가 바뀔 정도로 일본 정치가 무능해도 일본이 위기에 강한 것은 이처럼 1970~80년대에 축적한 엄청난 기술과 저축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몇몇 분야에서 일본에 앞섰다고 우쭐해할 상황이 아니다. 더 저축하고 더 수출해야 한다. 정치권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글로벌 위기가 도래할 때마다 IMF 외환위기의 악몽을 떠올리는 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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