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새로운 여행길

창세기 28

샬롬선교회

 

야곱을 내보내는 이삭의 태도에서 모종의 명랑함이 느껴진다. 그 명랑함은 축복의 계승이라고 하는 큰 문제가 어이없이 해결되어 짐을 내려 버린 것에서 오는 것이라고 추측한다. 처음에는 형 에서의 화가 풀릴 때까지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자신의 형에게 보내려고 생각한다. 하지만 28장은 야곱이 시급히 부모 곁에서 도망쳐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라기보다는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새로운 사명을 받은 야곱의 여행으로 볼 수 있다. 그 새로운 사명은 자신의 아내가 될 여자를 삼촌인 라반의 딸들 중에서 선택하는 여행이다. 도망의 여행이라고 하기보다는, 축복의 계승을 계기로 주어진 새로운 사명과 훈련을 띤 여행이다.

 

이삭의 경우는 스스로 자기 아내를 찾지 못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모두 상을 차리고 그것을 받는 것 뿐 이었다. 그런데 야곱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 여자를 찾아내서 자신 아내로 만들어야 했다. 고통스런 여행이 이때부터 시작되어 간다.

 

1. 이삭이 축복하고 떠나보낸 야곱 - 새로운 여행

 

+ 야곱의 하란[도피] (29:13); 야곱 77(147) = 이삭 137(180)

+ 야곱의 헤브론[정착] (35:27,37:1); 야곱 107(147) = 이삭 167(180)

+ 요셉의 출생/애굽[노예] (30:24/37:2); 야곱 98/105= 이삭 158/165

 

1절에서 이삭은 야곱을 불러들여 축복한 후에 브엘세바에서 어머니 리브가의 고향인 밧단아람(별명: 아람나하라임)으로 '보낸다.'(5).

야곱에 대한 일체의 책망은 없다. 5절에서 '보내다''-라하'(שָׁלַח)의 파울태로, 본래 '-라하'의 원의(原義)'(임무를 주어) 보내다'의 의미이다. 그래서 이삭은 야곱에게 '명하여'(צוה)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의 '명한다'는 강의형의 피에르태가 사용되고 있다. 덧붙여서 히브리어에서는 '명하다'는 능동형도 수동형도 모두 강의형에서만 사용된다. 그 명령이란 아버지 이삭이 아내 리브가의 호소(2746)와 슬픔의 말을 들은 적도 있어, 야곱에게 결코 가나안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얻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어머니의 고향에 있는 오빠 라반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얻으라는 것이었다. '명하다'(צוה)가 강의형(피에르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 계보에 있어 매우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6절에도 '보내다'라고 하는 것 '-라하'(שָׁלַח)가 나오는데 이때는 강의형(피에르태)이 쓰인다. 아마 형 에서에게는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호의적으로 보낸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 후 나도 부모님의 호의를 얻고자 삼촌인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9).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지 부모님의 호의를 얻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다. 이미, 에서는 축복의 계보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2. 돌베개를 베고 꿈을 꾼 야곱 (하늘에서 내려온 사다리, 첫 여호와와의 개인적인 만남)

 

첫 홀로 여행은 야곱에게 있어서는 매우 불안한 여행이었다고 생각된다. 어느 곳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기 위해 돌을 베고 잤을 때, 그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놀라운 꿈이었다. 야곱은 꿈속에서 여호와를 만나 여호와의 축복의 약속을 들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말씀한 것으로, 국토의 획득, 자손 번영, 만민의 축복이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약속이 정식으로 야곱으로 이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곱에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에도 없던 약속이 덧붙여져 있다. 그것은 2815절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신 이 약속에는 조건이 없다. 무조건적인 은총으로서의 약속이다. 이 무조건적인 약속이 형과 아버지를 속인 야곱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게다가, 아브라함나 이삭에게도 말씀하지 않은 특별한 약속의 중심은 15절의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데려오게) 할찌라(I will bring thee again in to this land"이다. 다시 말해, '이끌어 데려오기'까지의 기간이야말로 하나님이 야곱을 이끌어 주시는 중요한 기간이다. 그래서 '이끌어 데려오다'로 번역된 동사는 '돌아오다'를 뜻하는 '-'(שוּב)의 사역형이 사용되고 있다. 여기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이 숨겨져 있다. 여기서 '데려오다'는 하나님이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확약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실 그렇게 된 것이다(356절 참조). 그때 이미 야곱은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어 있었다.

 

비록 꿈속이었지만 야곱은 그 장소를 '벧엘'(בֵּית־אֵל),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하나님께 서원을 했다. 이 서원의 부분을, 신개역(新改訳)에서는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니(となってくださるので)"라고 확신적으로 번역하고 있다. 신공동역(新共同訳)에서는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면(となられるなら)"이라고 조건적으로 번역하고 있다. 口語訳, 岩波訳, 프란시스코회, 関根訳, 中沢訳, 尾山訳도 조건적으로 번역하고 있다. 전자의 예는 신개역 뿐이다. 신개역 성경을 주해하고 있는 新聖書注解(생명의 말씀사)에 따르면, 확실히 조건문이지만, '의혹을 전제로 한 가정'은 아니다. '약속을 감사합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될 것을 아는 자의 말임을 보여 준다. 이 관점에서는 오히려 야곱의 신앙 고백으로서의 성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신개역의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니,"는 타당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주석의 대가, F.B.마이어도 이곳은 야곱의 헌신의 때로 이해하고 '높은 결의'라고 기술한다.

 

나는 두 가지의 번역이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2절의 마지막 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는 '십분의 1을 드리다'라는 동사와 '서원을 드리다'라는 말이 같은 동사 '-'(עָשַׂר), 이것이 둘 겹쳐진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20절의 '서원을 세워 말했다'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도 동사 '서원을 세우다'는 뜻 속에 동사 '세우다'를 뜻하는 '-'(נָדַר)과 명사 '서원'을 뜻하는 '네델'(נֶדֶר)의 두 개의 같은 어간을 겹침으로써 야곱이 여호와에 대한 주체적인 서원을 세우고 있다. 그리고 '-' 동사는 여기가 처음 나오는 곳이다.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없던 여호와의 약속에 대한 맹세가 야곱에게서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이 야곱의 서원(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의 10분의 1을 드리겠다는 것)를 여호와께서 분명히 기억하셨다는 것을 창세기 3113절에서 알 수 있다. - 각주 -

 

야곱이 이곳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사랑)을 바탕으로 한 약속을 듣게 된다. 그래서 이 때 만큼은 솔직하게 하나님을 믿고, 신앙 고백으로서의 강한 표현이 수반된 '드리겠습니다'라는 고귀한 결의를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야곱이 고귀한 결의를 했다고 해도, 야곱은 그 결의에 알맞은 하나님의 그릇이 되지는 않았다. 야곱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생존과 방위의 보장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며, 그것을 '보장해 주신다면'이라고 조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확인되는 이스라엘 역사에는 이 하나님의 보장을 믿지 못하고 우상숭배로 치달았다가 결과적으로 나라가 망한 것을 생각한다면, '보증하여 주시니(保証してくださるので)'라는 고백은 그야말로 성숙한 신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야곱의 서원에서는 하나님이 말한 하나님의 계획의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 아직도 자기 본위의 부분을 많이 볼 수 있다. 야곱뿐만 아니라 인간은 많은 모순을 안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시작되는 야곱의 20년에 걸친 하나님의 훈련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야곱은 하나님의 훈련(시련)을 받음으로써 확실히 하나님의 계획에 유용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우리는 곧 보게 된다.

 

그런데 '돌아가게 하시면'이라는 것은 그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훈련 기간이 끝나지 않으면, 설령 야곱이 돌아가고 싶다고 해도 그렇게는 안 되는 것을 의미한다. 야곱이 하루라도 빨리 날짜를 잡고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에 의해 조정되는 필요한 기간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것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성령에 의해 다듬어지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훈련받을 때, 당장은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니고 차라리 슬프고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성령에 의해 훈련을 받은 자에게는 커다란 이득이 돌아간다. 야곱의 새로운 여정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곳을 향하고 있다.

 

각주

무엇 때문에 야곱은 10분의 1이라고 말했을까? 칸다 미츠루(神田満牧) 목사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이는 예수님께서 행해진 나병환자 10명을 치유(누가복음 17:11-19)의 기적으로 고침을 받은 10명 중 1명만이 큰 소리로 하나님을 칭송하며 되돌아와 예수님의 발밑에 엎드려 감사함으로써 성취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야곱(=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약의 확실함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탁월한 견식(卓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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