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증거

- 고린도후서 1:8-12 -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순진함/新共同訳)과 진실함(성실함/新共同訳)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서언

 

+ 고린도후서의 특징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그의 여러 가지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편지는 바울이라는 사람의 심정의 단면을 매우 잘 나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아시아에서 만난 고난에 대한 바울의 증거 [본문, 811]

(1) 8-9. ...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2) 10. ...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3) 11. ...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 본문 12절을 상고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의 행동은 "하나님의 순진함과 성실함"  

 

(1) "하나님의(으로부터 오는) 순진함과 성실함"

+ 사람으로부터 비판을 받거나 오해를 받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 열심히 포장을 하거나 자기 변호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본문 12]에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 사람들과의 신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설명합니다.

 

+ "하나님의 거룩함(순진함)과 진실함(성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이란 무슨 일일까요?

원문은 하나님의 순진함과 성실함으라고 합니다순진함은 '에일리클리네이아'(ελικρινείᾳ), 성실함은 '하프로테이스'(ἁπλότης)입니다. '순진함'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로 나타나지만'성실함'은 사람에 대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성실'은 인간관계를 구축해 나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실하지 않으면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상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그러한 인간적인(육적인) 지혜가 아니라 성실한 언동, 즉 언행일치를 보여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원천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실함'으로라는 말을 합니다. 게다가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2) '성실함''양심'

+'양심'이란 무엇입니까?

= '양심'이란 무엇이 좋은 일인지, 무엇이 나쁜 일인지를 민감하게 판단 능력입니다. 도덕적인 선악의 판단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이 '양심'입니다.

 

+ '성실함''양심'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 성경에는 '건전한 양심', '좋은 양심', '올바른 양심', '양심이 마비된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도 '양심이 찔린다'라든가, '양심의 가책에 고민한다'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람은 모두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무엇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를 가르쳐 주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더라도 인간에게는 도덕적인 선악을 판단하는 기능이 마음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이 양심을 따라 성실하고 올바르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라고 말합니다.

 

2.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품고, "양심의 증거"

 

+ 신약성경에서 '양심('스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29회 중 26회는 바울이, 다른 3회는 사도 베드로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 바울이 공회와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서의 변명 가운데서 그가 언제나 어떤 의식으로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은 사도행전 23:1, 24:16의 바울의 말입니다.

 

[사도행전 23:1] "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사도행전 24: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 구약성경에 '양심'으로 번역된 구절은 2구절 밖에 없습니다(사무엘하 24:10, 욥기 27:6).

= 2구절 모두 '마음'을 의미하는 어휘가 사용되고 있으며, 의역으로서 '양심'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양심'이라는 어휘 자체는 헬레니즘적 어휘일지도 모르지만, 그 기능은 인간의 마음에 갖춰져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고, 먹은 후에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합니다. 여기에 '양심'이 작용합니다. 나쁜 일을 해 버렸다는 판단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24:10]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양심/新改訳)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욥기 27:6]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양심/新改訳)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결언

 

양심의 존재는 선악, 곧 무엇이 좋은 것이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을 계속 거부한다면 그 기능은 마비되어 무감각하게 둔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사탄의 좋아하는 먹이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에 민감한 것, 양심에 따라 걷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순진함과 성실함으로 행동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